재차 삼차 약속을 하신 하나님의 뜻. / 출 34:1-17.
묵상자료 6930호(2020. 5. 7. 목요일).
시편 78:59-64.
찬송 53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에 스며드는 따뜻한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가정의 풍경, 저마다 다양한 가족 구성원과 모습들이 있을 텐데요. 이런 풍경은 그리 낯설지만은 않으실 겁니다. 올해 아흔이신 그녀의 시어머니 암세포를 발견했지만, 의사는 맛있는 걸 원 없이 드시라는 말만 해 주었고, 자녀들은 약만 잘 드시면 달라질 거라며 퇴원했습니다. 그 후 복수가 차면 입원해 조치를 받아야 했기에 입 퇴원이 자주 반복됐고, 몸과 정신은 쇠약해졌지요. 화장실에 갈 힘이 없는 건 물론 바로 전에 한 일도 기억 못하며,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아팠습니다. 남에게 몸을 맡기기 싫어해 직장에 나가야 하는 그녀 대신, 딸은 손위 시누이가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데, 시누이는 걸핏하면 남편과 싸워서 집으로 돌아가 버리길 반복했습니다. 모든 상황이 어머니 중심으로 비상사태로 돌아가면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힘들고 자식들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형제들이 모두 모이고 남편이 그녀를 대신해 음식을 준비하며 오랜만에 온 가족이 즐거웠던 식사 후. 열어놓을 창으로 집안에 시원한 막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설거지를 마친 그녀가 과일 접시를 들고 막 부엌을 나올 때, 순간의 풍경이 눈에 아니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가장 시원한 곳에 놓아둔 휠체어에 어머님이 편안하게 앉아서 졸고 계셨고, 시 아주버님은 그 옆 소파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남편과 형님은 식탁에 앉아서 병원에서 준 어머니 약이 너무 많고 중첩된다며, 성분과 효능이 적힌 설명서를 보고 토론하고 있었지요. 순간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아 왜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을까? 이 상태에서 행복하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을까? 생로병사 모두 신이 주신 것인데 과연 생일 때만 행복하고, 노병사일 땐 불행하게 살라고 한 것일까? 그러고 보면 이런 것도 같습니다. 지금 상황이 늘 부족하다 느끼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여만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마도 그 깨달음의 순간이 지나면 또 고통의 시간과 사소한 다툼, 그리고 감정의 소모가 간혹 이어질지 모르지만, 그녀의 마음에 자리 잡은 이 생각은 많이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불완전한 그대로 완전하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현재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년 7월 13일 방송>
2. “모세가 새 증거판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올라가다(1-4절)”과 “야훼께서 이스라엘과 다시 계약을 맺으시다(5-17절)”을 읽었습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약속을 떠올리는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에게는 별로 야단을 맞지 않았지만, 어머니께는 말썽꾸러기였던 소년이었습니다. 6.25 사변을 겪은 후 초등학교엘 들어갔는데, 아마도 3, 4학년 때쯤 막 나일론 양말이 나왔고, 입고 다니는 옷은 광목에 검정 물을 들인 거였는데, 거의 매일 옷을 더럽혀서 야단을 맞았습니다. 다행히 집 앞에 깊은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옷을 빨아 햇볕에 말리고 풀을 해서 또 말린 후 숯불 다리미로 다려 입곤 했으니까, 어머니의 많은 수고가 필요했습니다. 그래도 놀이터가 먼지 밭과 흙탕 논이어서 숨바꼭질도 씨름도 하느라 옷이 성할 리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넘게 “제발 침착하거라. 앞 뒤 잘 보고 다니거라.”는 약속을 하곤 했습니다. 정말 어머니 속을 많이 썩혀드렸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파출소 돌 담쟁이를 허물었을 때, 생긴 돌무더기 속에 미국에서 보내 준 잘 튀는 공이 들어갔고, 그걸 찾느라 그 위에서 뛰다가 넘어져 오른 쪽 앞정강이 뼈 사이가 깊이 찢어졌고, 무려 스무 바늘이나 꿰매는 대형 사고가 난 것입니다. 약속위반의 대가는 엄청났습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 그것은 아주 오래된 인간의 습성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약속하실 때, 그걸 알고 계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쪽으로 길들어버린 인간들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재차, 삼차 약속을 하신 것은 면죄부를 주려는 게 아니라, 생명이 소중함을 알리려 하심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