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주례사야 말로 한 가지 주제에 올인하기를.
요즘 예식장에서 주례자들이 듣게 되는 부탁의 말씀 하나는 시간을 지켜달라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짧은 주례사를 원하는 경향이라고 에둘러댄다.
빨리 빨리 문화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고 애써 서운함을 감추어 본다.
딱 1시간의 예식 시간이니 수지를 맞춰야 하는 운영자에게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주례사야 말로 온갖 좋은 말을 다 늘어놓을 수는 없다는 일이다.
사실 결혼 당사자들을 생각하는 주례사라고 한다면 정말이지 신중해야 할 것이다.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이건, 아니면 정 반대로 하나의 요식행위로 생각하는 사람이건 간에,
주례사에 얼마나 귀를 기우릴까를 생각해 보면 알만하다 생각해 본다.
나는 설교자로 강단에 설 때마다 생각하는 게 있다.
설교는 청중이 제대로 듣도록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를 제대로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중에 가장 문제되는 것은 장황스러움이다.
소위 첫째 둘째 등이 한 스무가지쯤 하는 경우를 보기 때문이다.
설교문을 읽는 것도 아니고 귀로 듣는 일인데,
그 많은 하나 둘을 어떻게 다 정리하고 종합해서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른바 중심주제 혹은 초점에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중심 주제를 향해서 모든 생각을 모으도록 힘써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은 설교만이 아니라 주례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사설은 이쯤하고 실제로 들어가 보자.
나는 "온전한 사랑을 하라."는 주제로 참 많이 주례사를 읊었다.
이 주제가 적당한지 여부는 다음 내 경험을 참고할 필요가 있어서 먼저 얘기한다.
1970년대 말부터 80년 3월까지 나는 부산 YWCA 규수학당에서 강사로 일했다.
1년에 딱 한 시간 주어지는 강의인데 짤리지 않고 몇 년을 계속했는데,
이 주제가 나와 함께 규수학당에서 공부한 처자들에게 차기 강의로 추천된 때문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주제로 강의를 부탁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라고 정의하고 그걸 풀어가는 게 내 강의의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사랑해서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또 사랑해서 결혼생활을 계속한다고 전제하였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생각하거나 꿈꿔왔던 것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을 결혼과 함께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과 함께 사랑의 기쁨 보다는 사랑의 슬픔 혹은 사랑의 아픔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체로 사람들은 사랑할만 하니까 사랑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름다운 얼굴,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 단정한 옷 맵시, 적절한 매너 등등이 그렇다.
나는 이런 점들은 사랑의 앞 모습이라고 규정한다.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며 꾸미는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 말을 하기 위해서 수 십번도 더 넘게 말하기를 연습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여러 종류의 블라우스를 갈아 입었을 수도 있다.
향수도 이런 저런 종류로 뿌리기도 했을 수 있다.
할 수 있는 한 자기를 잘 보여주기 위해서 온갖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했을 수 있다.
당연히 이런 노력을 기우렸다면 웬만한 사람에게서는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사랑의 뒷 모습도 있다는 슬픈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꾸밀 수가 없는 곳, 언제든 긴장이 풀어지기만 하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말한다.
요즘은 신혼여행지에서 친정집으로 돌아오는 신부들이 제법 있다고 한다.
사랑의 환상이 단 한번에 깨트려져 버린 때문이라고 한다.
꾸미지 않은 민낯이 너무도 흉물스러워 도저히 갚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는 것이다.
죽은 깨가 가득하고, 얼굴이 포악해 보이고, 흩으러진 옷 맵시, 무매너에 자기 중심적인 태도 등등.
그 뿐이 아닐 것이다. 결혼식에 참석한 상대방 가족들 중에는 문제아들도 보였다고 하자.
사기를 치다 감옥살이를 한 삼촌도 있고, 부모와 형제에게 기대고 사는 가족들도 있었던 것이다.
결혼 전에는 꼭꼭 숨겨두었던 가족사들도 하나 둘 불거져 나올 것이다.
절대로 사랑하고 싶지 않은 구석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파혼을 하거나 이혼을 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야 할까?
내 강의는 바로 이 지점을 문제를 발견한 지점이라고 정의한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일은 괴로운 일이긴 하나,
어디 문제없는 인생, 문제없는 가정이 있을 수 있을까?
진짜 문제는 그 문제를 방치하거나 내 던지지 말자는 것이다.
문제는 풀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를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풀기 위해서 정면으로 나서는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 내 놓은 해답은 인정하고 조정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때 친구들과 공차기를 하다가 오른쪽 정강이가 찢어져 20바늘을 꿰맸다.
그래서 장가를 못 갈 것이라고 걱정하며 살았다.
그래서 아내가 될 여인에게 그 비슷한 말을 했는데,
돌아온 답은 너무 거창했다. 당신이 큰 병을 가졌다고 해도 사랑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말을 기억하며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참 자유를 느낄 수 있게 한 말이었다.
문제를 인정하기가 힘들지.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은 그리 힘들지 않다.
다음은 조정하는 일이다. 조정이라는 말은 맞춘다는 말이다.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만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여러분은 잘 알 것이다.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이 만났다면, 같은 수준에 이르도록 배우도록 도울 수 있고,
아니면 좀 더 아는 사람이 채워주면 될 일이다.
조정하는 것은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꼭 필요한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는 아픔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 인간은 욕망이 넘치는 때문이다.
이 경험이 내 주례사에 녹아 있다.
사랑하라. 앞 모습만 사랑하려말고 뒷 모습도 사랑하라.
약하고 부끄러운 뒷 모습 때문에 아픔이 있을 수 밖이지만,
그것을 사랑할 때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배울 수 있는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장점만이 아니라 약점까지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다.
아픈 사랑이고, 참 사랑이다.
오늘부터 그런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반쪽 사랑을 할 것인가? 아니면 온전한 사랑을 할 것인가?
여러분의 앞날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여러분을 격려해 주실 것이다.
주례사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