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된다고? / 엡 3:1-13.

박성완 2020. 5. 25. 00:30

묵상자료 6948(2020. 5. 25. 월요일).

시편 82:3-5.

찬송 25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계의 문학사에서 읽어버린 보물이라고 하면,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22년에 읽어버린 원고 뭉치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그 때는 아직 무명작가에 불과했던 그가, 당시 첫 번째 아내와 파리에 머물면서, 신문사 특파원 일을 하는 한편으로 틈틈이 단편소설을 여러 편 썼는데요. 그 초창기의 원고를 몽땅 분실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손으로 쓴 초고 타자기로 친 원고 그리고 사본까지, 말 그대로 몽땅 이었습니다. 아내가 그 원고들을 모두 가방 속에 넣어서 로잔에 있던 그에게 오던 중, 리옹 역에서 가방을 도둑맞았기 때문이었는데요. 작가에게 원고 분실은 교통사고보다도 더 지독한 불운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그 때의 절망이 얼마나 컸는지, 헤밍웨이는 더는 글을 쓸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 빠질수록, 오히려 괜찮다고 큰 소리치는 경향이 있지요. 헤밍웨이도 그랬습니다. 자책을 하는 아내와 걱정하는 친구들을 향해서, 가슴아파하지 말라고 초기 작품들을 잃어버린 건 나를 위해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다독이면서, 다시 단편을 쓸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 말을 하는 순간 진심이 되었고, 얼마 후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더 이상 단편이 아닌 장편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거지요. 그래서 장거리 달리기를 연습 하듯이, 조금씩 조금씩 긴 글을 쓰는 훈련을 했고요. 그 결과물이 첫 번째 장편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옅습니다. 이 작품으로 헤밍웨이는 문단의 호평을 이끌어 내면서 드디어 작가로써 주목받기 시작하지요. 원고를 잃어버린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말했던 것이, 현실이 된 겁니다. 또 그런가하면 또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있어요.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칼라일이 [프랑스 혁명사] 원고를 2년여에 걸쳐서 완성한 후에 그의 친구 존 스튜어트 밀에게 감수를 부탁합니다. 밀이 한 달 만에 감수를 끝내고 원고를 돌려주려고 원고를 찾았는데,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밀이 하녀에게 물었더니, “쓸모없는 종이 뭉치인줄 알고 벽난로 불쏘시개로 썼다.” 라고 했지요. 칼라일의 낙심이 얼마나 컸을까요? 2년 동안 심혈을 기우린 원고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다니.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시 써야하는가? 하루에도 열두 번 넘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벽돌공이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는 것을 보고, 원고를 다시 쓰기로 결심했다고 하지요. 원고는 다시 쓰는 과정에서 더욱 알찬 내용이 되었고, 이렇게 완성된 [프랑스 혁명사]는 토마스 칼라일을 위대한 사상가로 만들어 주었지요. 헤밍웨이와 칼라일은 예상치 못한 불운을 피하지 않고, 다시 도전했습니다. 두 번째였기 때문에 방법과 내용은 이전보다 오히려 탁월한 것이 됐지요. 그렇게 사는 동안 불운이나 불행을 겪을 때,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정면으로 맞선다면, 온 힘을 다해서 그럴 수 있다면, 그 나빴던 것들이 우리의 존재를 들어 올리는 지렛대가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말이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326일 방송>

 

2. “이방인을 위한 바울의 사도직(1-13)”을 읽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 히브리인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 이외의 모든 사람들 곧 이방인(異邦人)입니다. 이런 구도는 구약 성서에 줄기차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흥해야 하고, 이방인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때문에 망해야 옳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도도한 흐름에 반기를 든 사람이 나타났는데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 공언한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받은 심오한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도의 선언은 엄청난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선포하는 것은 언어도단에 해당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이방인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이방인>의 소설가 알바르 까뮈는 삶의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인간의 기본조건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어 있지도, 굴러가지도 않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라고 말입니다. 마치 햇빛이 눈부셔서 사람을 죽였다는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이나, 시지프스의 돌처럼 끝없는 반복적인 헛수고가 삶의 부조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조리는 기독교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을 향한 책임전가에 불과한 것입니다. 차라리 죄가 들어온 삶에는 수많은 부조리들로 가득 채워진다가 맞습니다. 부조리는 밖을 내다보는 시선이라고 하면, 죄는 안을 들여다보는 눈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는 더 이상 이방인의 굴레에 갇혀 살아서는 안 될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책임을 짊어지고 이방인의 세계로 뛰어들려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모두가 이방인들로 가득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구실 못하는 선민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