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똑같이 귀한 존재들. / 엡 4:1-16.

박성완 2020. 5. 27. 00:00

묵상자료 6950(2020. 5. 27. 수요일).

시편 83:1-2.

찬송 52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에 스며드는 따뜻한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동화 <개미와 배짱이>에 등장하는 배짱이는 개미가 땀 흘리며 겨우 채비를 하는 여름 내내, 시원한 그늘 속에서 열심히 노래만 불렀지요. 그 덕분에 게으름의 대명사로 인식됐고, 날이 추워졌을 땐 개미 집 문 앞에서 구걸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사실 배짱이가 여름내 울어대는 건 한가롭게 노래하며 즐기는 게 아니라고 하지요. 어떡하든 암컷을 유혹해서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겨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이 담긴 최선의 행동인 겁니다. 다른 수컷들보다 더 오래 더 큰 소리로 노래해야, 매력적으로 보이고 또 후손을 남길 수 있으니, 이들에겐 이 노래가 처절한 몸부림일 수도 있습니다. 동물 행동학자들은 배짱이들이 실제로 겨울이 되기 전에 이미 죽기 때문에, 암컷들을 하루빨리 알을 낳아 땅속 깊이 묻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이듬해 봄, 자신의 후손이 태어나서 대를 잇게 되니까요. 그래서 개미와 배짱이를 각색한 이야기 중에 이런 것들도 있지요. 배짱이가 먹을 걸 얻으러 가보니, 개미가 여름내 너무 일만해서 병이 나 버렸다. 혹은 놀고 있는 배짱이를 보며 한탄했던 개미들에게, 겨울이 돼서 도착한 엽서 한 장, 자신은 따뜻한 해외로 여행을 왔는데 잘 지내냐면서 안부를 묻더라, 라는 얘기도 있지요. 나이를 한 살을 먹을 때마다 장래 희망이 바뀌는 아이들처럼, 살아가면서 바뀌는 생각들, 참 많습니다. A라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B였고, 당연한 이치로 생각했던 게 틀린 것 같고, 옳다고 믿었던 것들의 이면, 정석이라 믿었던 공식들의 허점이 보이는가 하면, 부분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것들의 전체가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다른 방향과 각도에서 바라볼 때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도 느끼게 되지요. 사실을 알고 나면 비웃었던 배짱이에게도 문득 미안해지듯, 그렇게 고정된 인식 때문에 미안해지는 마음, 어디 배짱이한테 뿐일까요? 그동안 내 생각의 틀이 갇혀 있던 어떤 대상, 사과해야 할 존재들 어쩜 살아가면서 더 많아질지 모르겠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922일 방송>

 

2. “일치를 호소함(1-16)”을 읽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배운 두 가지 말이 있는데, 하나는 정체성이라는 뜻의 identity란 말과, 다음은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뜻의 unity in diversities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말을 자주 사용했던 기억이 납니다. 1970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대학가는 군사교육에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나더니 곧 바로 유신체제로 돌입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말은 더욱 더 저의 뇌리에 박혔는지 모릅니다. 개성 넘쳐야 할 젊은이들을 제복으로 통일시키려 한다든지, 이도 넘어서 반공 이데오르기로 사람들의 생각과 정신을 묶으려는 정치 분위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숨을 죽여야 했습니다. 정체성이란 자기다움을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이고, 다양한 생각과 관심을 거대한 공동체로 묶는 일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연배의 친구가 매일 아침이면 북을 들고 나와서 데모대에 합류하라고 할 때, 저는 교실을 지키겠다고 따라 나서지 않았고, 그래서 헬라어 문법은 교수님과 저 혼자서 공부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했던 변명은 너희는 나라를 지키고, 나는 학교를 지킨다고 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도 저는 6년간을 서대문 경찰서 정보과의 사찰을 받았으니 한 번의 신문대담 출연이 가져다준 업보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 교회를 비롯해서 초대 교회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을 취급하고 있는데, 교회 안에 다양한 구성원들로 인해서 다소 교회가 시끄럽고 험한 지경에까지 이르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직분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령 사도와 예언자, 그리고 전도자와 목자와 교사 등의 직분은, 세속적인 직급처럼 차등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사도는 이 모든 직분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주신 선물인데, 곧 하나로 어우러져서 하나님께 영광돌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성령도 그리스도도 그리고 희망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임을 말씀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예배를 섬기는 이들, 가령 사회자나 설교자 기도자 그리고 봉사자 들이 더 높거나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성도들과 똑같은 예배자에 불과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를 잘못 가르쳐온 것이 사실입니다. 주의 종이라는 말은 주의 백성들의 위치를 떨어트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예배자들은 높낮이가 없이 똑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예배 봉사자들 심지어 설교자 역시 자신의 순서가 아니면 한 사람의 예배자로써 자기 자리에서 예배해야 옳습니다. 다양한 직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나, 세상을 섬기는 봉사에서 똑같은 위치에서 임무를 수행할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