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신앙이 흔들릴 때 지켜주시는 성령님. / 요일 2:18-27.

박성완 2020. 6. 4. 00:36

묵상자료 6958(2020. 6. 4. 목요일).

시편 84:5-8.

찬송 16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각하다 못해, 그 통역사는 한국 쪽 참석자들에게 사정을 솔직히 말하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제가 통역을 하다가 이 부분입니다. 라고 말하면, 거기서는 무조건 좀 웃어주십시오.” 라고요. 그 부탁 자체가 재미있어서 그날은 결국 웃음까지 통역해내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하지만 평소 진땀나는 상황은 적지 않지요. 그 때마다 그는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움베르트 에코의 산문집 번역한다는 것에 나오는 저 한마디에서 많은 도움과 위로를 받는다고 합니다. 특히 그 도움이나 위안은 통역이나 번역 일을 할 때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상생활을 하면서,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더 큰 도움과 위로를 받지요. 일상속의 대화에서야 말고 우리가 같은 언어를 쓰는 대도 불구하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옮기거나 전해 듣다가 서로 오해하고 화를 내는 일도 또 얼마나 많은지요. 그럴 때마다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직접 들었든 전해 들었던 내가 들은 얘기 속에는 분명 채 다 옮기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은, 다듬어서 버려버린 이야기와 의미 혹은 재미있는 농담이 있을 거다. 그러니 무슨 말이든 늘 폭넓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웃어야 한다고. 일상대화에서야 말로 바로 이 움베르트 에코의 한 마디 번역이라는 것은 언제나 원래의 용어가 포괄되는 결과물중 일부를 다듬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번역은 절대로 똑 같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 한 마디에 마음을 물들인다고 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5618일 방송>b.

 

2. “그리스도의 적(18-27)”을 읽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지금부터 2천 년 전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 지방 그리고 로마를 중심으로 일어난 쿰란 공동체와 함께 신흥종교를 일컫습니다. 그 배경에는 구약의 모세 5경을 중심으로 예언서와 지혜서들을 경전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히브리 민족이 있었지만, 그 세력은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세주 혹은 메시아(헬라어 그리스도)로 믿는 이 무리들은 세력을 확장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해 가고 있었습니다. 겉모양새로 보아서는 매우 허약해 보이는 이 신흥종교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파괴력을 드러냈고, 세계 최강이던 로마 제국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로마 제국의 오랜 종교였던 태양신에서 야훼 하나님으로 국교가 바뀌게 되었고, 정치적인 안정에 힘입어 세계를 향해서 향해 가장 열심 있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직 로마의 비호를 받기 전 단계로, 로마 당국자들에 의해서 극심한 탄압을 받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회의 발상지인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교의 박해가 극심해서 소수의 유대적 기독교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방적 기독교인들은 소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주로 바위틈이나 땅 속에 은거지를 두고 숨어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말 사상은 매우 자연스러운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른바 주의 날혹은 마지막 때가 그런 단어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을 적그리스도라는 말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과거에 크리스천으로 함께 동고동락했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요즘도 안티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 중에 가장 적극적으로 기독교회를 폄훼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은 한 때 교회에 적을 두었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종 혹은 배신을 분명하게 하는 방법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곤 합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가장 교회를 흔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배교자들로 인해서 교회는 거센 태풍에 쓸려가듯 교회를 초토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격려하는 방법은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 외에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님만이 연약한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위로와 용기 그리고 소망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