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유일무이한 방법. / 갈 5:16-26.
묵상자료 6986호(2020. 7. 2. 목요일).
시편 89:35-37.
찬송 42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760년대 말부터 1780년대 중반에 걸쳐 독일에서는 클링거의 희곡 질풍노도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질풍노도 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합리적이고 형식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자연과 자유, 열정을 갖기를 희망하는 문인들, 그 속에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슈톨베르크가 있었는데요. 그가 남긴 시 중에, 해 저무는 물가에서의 단상을 노래한 시가 있습니다. 1782년 그의 신부에게 헌정된 시로, 41년 뒤에 슈베르트에 의해서 음악이 입혀졌는데요.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를 쓴 1823년도의 일이었지요. 내가 찾은 노래, 오늘은 슈베르트의 가곡 “물위에서 노래함”을 들려 드립니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물결의 빛 한 가운데, 백조처럼 미끄러져가는 흔들리는 작은 배. 은은하게 빛나는 기쁨의 물결위에, 영혼도 그 작은 배처럼 미끄러져 나아가네. 하늘로부터 물결위로 내려온 저녁놀이 작은 배를 둘러싸고 춤을 추네. 서쪽 숲의 나무 꼭대기 위에 불그레한 빛이 우리에게 다정히 손짓하고, 동쪽 끝에 나뭇가지들 아래 불그레한 빛 속에 창포가 속삭이네. 홍조띤 빛 속의 영혼은 하늘의 기쁨과 숲은 안식을 호흡하네. 시간은 흔들리는 물결위에서 나를 위해 이슬 젖은 날개를 달고 사라져버리는구나. 시간은 어제와 오늘처럼 다시 내일도 반짝이는 날개를 달고 사라져 버리리라. 내가 더욱 고귀하고 눈부신 날개를 타고 변화하는 시간으로부터 사라져 버릴 때까지.”<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14년 7월 5일 방송>
2. “성령의 열매와 육정의 열매(16-26절)”을 읽었습니다. 인간은 크게 두 가지 욕망을 안고 살아갑니다. 소유의 욕망과 나눔의 욕망이 그것입니다. 소유의 욕망은 생리적인 욕망이라고 부르고, 나눔의 욕망을 윤리적인 욕망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욕망은 적당할 때 정당성을 가지지만 지나칠 때 비난을 받게 마련입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사춘기가 되면 이성을 찾는 욕망이 생깁니다. 생리적 욕망입니다. 그런가하면 추운 날씨에 헐벗은 사람을 보면 겉옷을 벗어 주고 싶고, 배우고 싶은 영민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윤리적 욕망입니다. 모두다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욕망들입니다. 이런 욕망들이 제대로 충족될 때 그 사회나 집단을 건강하게 생활할 수있고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욕망들 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성령의 지도를 받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율법의 세력 아래 있는 육적인 욕망들은, 언제든 생리적 욕망과 윤리적 욕망을 무참히 파괴할 수 있다는점입니다. 곧 음행, 추행,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 맺기,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등입니다. 누구도 생리적이며 윤리적인 욕망을 통제하고 유지하기에는 무력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지도를 받을 때만이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을 수 있다고 사도는 소개합니다. 곧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육적인 욕망들이 맺는 열매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들에게는 너무도 낯선 것들입니다. 과연 누가 성령의 지도를 받을 수 있으며, 누가 이런 환상적인 성령의 열매들을 맺힐 수 있겠습니까? 사도는 예수께 속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일로, 자신의 육체를 모든 악한 욕망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유일무이한 가능성을 예수 안에 있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안에 자신을 정박하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앞세우는 일입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 시골 장날 어머니를 따라 시끌벅적한 장터에 들어섰는데, 무서운 셰퍼드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합니까? 어머니의 치마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앞세우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첩첩산중, 백척간두와 같은 인생살이를 통과하면서 예수님을 앞세우는 경험들을 가졌던 분들이라면, 여전히 명치끝은 한없이 아파오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에서 새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