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기만 해도. / 롬 3:9-20
묵상자료 6995호(2020. 7. 11. 토요일).
시편 90:14-17.
찬송 33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유유자적(悠悠自適), 바쁠 때 떠올려보는 한자성어입니다. 속세를 떠나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편안하게 사는 모습, 누구나 한번쯤은 그려보지요. 중국 동진 시대의 사람 왕희지는 유명한 서예가 왕휘지의 아들로 출세에 뜻이 없고 자연을 벗 삼아서 그야말로 유유자적하게 사는 인물이었습니다. 깊은 산속 강가에 집을 지어 세상을 등지고 자연과 짐승들을 벗 삼아 신선처럼 살았는데, 어느 추운 겨울 밤 온 산이 눈에 덮여 세상이 하얗고 보름달이 떠 푸른 달빛 휘장을 드리우니 정취가 그만이었지요. 그는 황홀한 설경에 취해서 혼자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문득 대규라는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역시 출세에는 무관심한 사람이어서 누구보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였지요. 서둘러 작은 배를 타고는 마치 그가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노를 저어 갔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밝은 달빛아래 거문고 타며 퉁소불고 시 지으면 그야말로 신선의 풍류가 아니겠는가 생각하면서요. 하지만 먼 길을 가는 동안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그의 감흥은 식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친구의 집이 저만치 보였을 때 즈음엔 흥이 완전히 가라앉아 버렸다지요. 그래서 그는 즉시 배를 돌려서 먼 길을 되돌아왔습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어이없어 하면서 “아니 이 사람아 그 먼 길을 근처까지 와서 되돌아가는 법이 어디 있나.” 그러자 왕희지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아 흥이 나서 자네를 만나러 왔는데, 그 흥이 죄다 깨져버린 다음 만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시간적인 계산이나 먼 곳 까지 가는데 공이 아깝다고 하는 이해득실에 상관없이, 그저 감정에 충실하고 순간에 집중하는 그의 유유자적. 그야말로 순도 100%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만큼을 했으니 조금이라도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 계산을 알게 모르게 했다면, 진정한 유유자적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년 7월 20일 방송>
2. “모두가 죄인이다(9-20절)”을 읽었습니다. 또 다시 사도는 자문자답합니다.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이냐?” 라고 묻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라고 엄청난 소개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선민이라는 말도, 복을 받은 자라는 말도 아무런 보증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도 하대하고 업신여기던 이방인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역시 동일한 죄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는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붙잡혀 있는 한 그 어떤 존재도 밑바닥 인생이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잘 지켜보았습니다. 대통령의 물망에 올랐던 정치인이 어떻게 추락해서 최악의 자리에 떨어졌는지, 인기를 구가하던 유명배우가 어떻게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는지를 말입니다. 그 원인들은 한결같이 죄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유대인이나 그 밖의 특정한 어떤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는 시편 14:1-3, 53:1-3, 그리고 전도서 7:20을 인용하면서 죄의 보편성을 일갈합니다.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올바른 사람, 義人은 없다고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말문이 막힙니다.
이런 결론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사도는 율법 아래 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몇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는 죄를 고발하는 기능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 때문에, 우리는 음욕을 품는 것이 간음 자체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둘째 기능은 죄를 짓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 된 일이기에 우리는 우상 숭배자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율법의 세 번째 기능은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때 그리스도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율법이 몽학선생이 된다는 이해입니다. 몽학선생을 헬라어로 파이다고고스라고 부르는데, 주인의 아들을 선생께 데려다주는 종의 직분입니다. 어쩌면 율법이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역할일지 모릅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로 인류의 스승이 되었다면, 바울은 “내가 죄인인 것을 알고 있다.”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구원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