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믿음의 모델이 된 실례(實例). / 롬 4:1-12.
묵상자료 6998호(2020. 7. 14. 화요일).
시편 91:8-11.
찬송 36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키가 크고 덩치도 큰 고등학생인데, 가방들이 다 작아서요. 큰 가방 좋은 브랜드 있으면 추천 좀 해 주세요.” 어떤 학생이 SNS에 질문을 올리자, 누군가 이런 답글을 달았습니다. “큰 가방이라면 일단 짐이 많이 들어가고 편한 인체 공학적 디자인을 원하시겠군요. 요즘 가방들은 친환경적이지 못하고 자원낭비도 심합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추천해 드려요. 메이드인 조선, <시골>이라는 브랜드에서 만든 가방, 품절됐는데 어제 입고됐다니까, 빨리 가서 구매하세요.” 무슨 얘기인가 궁금했는데, 이 답글 밑엔 지금은 보기 힘든 옛날 지게 사진이 실려 있었고, 보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독일 기자 지그프리트 켄테가 1901년에 펴낸 [한국 견문록]에는 지게를 두고, 어깨 근육을 이용해서 힘을 덜 들이고 쉽게 운반할 수 있게 만든 조선인의 탁월한 발명품이라고 적고 있는데요. 오랜 옛날 보자기 이외의 가방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지게도 꼽힐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개인으로써의 내 역사 속엔 어떤 가방들이 있었을까요? 태어나서 처음 가졌던 책가방, 어떤 모양 어떤 색이었는지 혹시 기억나시는지요? 동화 속 주인공이나 만화캐릭터가 그려진 가방에서부터 천년 기에 어울리는 다양한 빛깔과 무늬의 가방까지. 양 어깨에 메거나 어깨 한쪽에 둘러메기도 하고 또 손으로 드는 크고 작은 가방들. 책가방을 사고 책을 넣고 한 시절이 지나면 또 새 가방에 새 책과 소지품을 넣고. 그렇게 가방을 바꾸면서 인생은 흘러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박현수 시인의 시 <가방에 손을 넣을 때>입니다. “가방을 열면 소처럼 검푸른 심연이 출렁인다/ 당신 손이 아무리 깊이 휘저어도 닿지 않는 어둠이 있다/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끔씩 물건들이 사라지는 곳/ 어느 순간 손등이 다른 허공에 놓인 듯 서늘할 때/ 블랙홀 속에 손을 집어넣고 우주의 자궁을 더듬고 있는 당신/ 닿지 않는 어둠 속 어딘가 당신의 슬픔이 희미하게 빛날 법도 하지만/ 어느 가방도 한 사람의 일생을 다 담을 순 없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년 7월 22일 방송>
2. “아브라함의 믿음(1-12절)”을 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주전 1918년 경 바벨론과 페르시아 사이의 작은 나라 갈대아에서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과 함께 메소보타미아의 하란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 하란에서 아버지가 죽자,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정처 없이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됩니다(창 12:1-4, 히 11:8). 훗날 이를 두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관용어가 붙게 되는데(창 15:6), 우리가 믿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하면, 바로 이 아브라함을 추적하고 해석한 바울 사도의 증언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 없이 순종하고 행동한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성경은 아브라함을 기점으로, 역사 이전의 시대(先史時代)와 역사 시대로 분류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이전의 기록들은 선사시대에 해당되기 때문에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포함한 모세 5경은 아브라함보다 400년 뒤인 주전 1520년의 인물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선사시대가 아니라 역사시대의 인물 아브라함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인물이 믿음으로 역사에 참여했다고 하는 것도 말입니다.
인간 아브라함은 흠결이 많은 사람입니다. 도덕이나 윤리라는 측면에서 더욱 그렇습니다(창 12:10이하, 20:1-2).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르셨는데, 까닭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을 보신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올바른 관계였다고 바울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훗날 다윗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고, 죄 없다 인정받은 사람이다.”(시 32:1-2)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없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덮어줌을 받고, 죄 없다 인정받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기독교회 신앙의 정수(精髓)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 죄 없다고 인정받는 것, 이런 하나님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