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만이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신다. / 롬 7:7-25.
묵상자료 7006호(2020. 7. 22. 수요일).
시편 94:1-4.
찬송 41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빈의 숲속의 길을 친구와 함께 걷고 있던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 그는 숲속 어느 길목쯤에서 가슴 뭉클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나이 많은 떠돌이 악사가 속세의 일을 모두 잊은 듯, 한적한 숲속에서 무심한 듯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던 건데요. 발길을 멈추고 그 단조로운 음악을 듣던 말러는 친구에게 말합니다. “지금 보는 저 사람이 현대 음악가의 참 모습이다. 듣고 있는 건 숲속의 나무들뿐이지만, 열정을 다해 연주하고 있어.” 구스타프 말러의 일생은 시간과의 싸움이었고, 시즌 중에는 작곡할 시간이 없었기에 휴가 기간에 집중해서 곡을 썼는데요. 여름이 되면 잘츠부르크 근교의 아테 호반에 있는 작업실에 들어가서 창작에 몰두하곤 했습니다. 여름휴가만큼은 분주한 오페라 시즌의 잡다한 문제들을 잊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는데, 그 여름 별장으로 제자인 브루너 발트가 방문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아주 좋은 날씨여서 두 사람은 정원 한 구석의 벤치에 걸터앉았지요. 발터가 풍경을 보며 감격하며 말했습니다. “힘차면서도 맑은 하늘, 꽃이 만발한 초원, 앞에는 짙푸른 호수가 있고, 뒤에 산과 들이 보이니, 주변 풍광이 정말 아름답군요.” 그러자 말러는 웃으며 이렇게 답했답니다. “너무 그렇게 감격해할 건 없어. 발터군. 이 대자연의 생기는 내가 모두 작곡해버렸으니까.” 고난과 역경이 많았던 삶속에서도, 대자연의 웅장함과 조화를 추구했던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 그가 자연을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일화들인데요. “그는 지휘대에 처음 나타나던 바로 그 순간 빈을 정복했다. 청중에 대한 그의 지배는 마지막까지 깨지지 않았다.” 라고 했던 부르너의 말처럼, 작품을 완벽하고 명료하고 남김없이 들어내는 공연, 악보에 광적으로 충실했던 말러의 특성은 거대한 자연으로부터 온 힘이 아니었을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년 8월 19일 방송>
2. “마음의 법과 육체의 법(7-25절)”을 읽었습니다. 마음과 따로 움직이는 육정이 있다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사도는 마음의 법 곧 양심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양심은 한결같이 우리들로 하여금 바른 일을 추천하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체에 있는 탐욕이 그 양심의 권고를 무시하고 제 멋대로 행동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이미 우리들 육체를 빨갛게 물들인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순수하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생각들일지라도, 우리를 어리석고 바보스럽게 살도록 만드는 죄가 심통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죄 가운데서 헤매고 있는 우리들 인간이야말로 불쌍하고 곤고한 존재라고 탄식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칭찬합니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며 미투 운동에 적극적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 진흙탕 속 한복판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이상과 신념과 노력이 허약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죄성이 그 안에 스며들어 와 있었던 것입니다. 양심도 율법도 그 위험한 죄성을 막아서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가끔 사용합니다만, 인격자란 양심이 확실하게 살아있는 구별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 안에도 역시 죄성이 가득 차 있었으나, 다만 그것들이 밖으로 튀어 나가지 않도록 온 힘을 기우려 붙잡고 있을 뿐입니다. 어느 누가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죄 아래서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라는 바탕에서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불교인들입니다. 붓다는 삶을 관통하는 근본 진리로 고집멸도(苦集滅道)라 불리는 사성제(四聖諦)를 제시합니다. 고(苦)는 생로병사를 비롯한 현실 세계의 고통을, 집(集)은 고통을 낳는 애욕과 집착을, 멸(滅)은 고통과 번뇌의 소멸을 뜻하는 해탈을, 도는 열반에 이르는 올바른 수행법으로 팔정도를 말하는데, 미혹의 세상을 건너는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에 훨씬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이라는 절대자가 없습니다. 누구나 해탈할 수 있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때문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고통과 번뇌를 소멸시키고 해탈에 이르는 것으로, 선행과 좌선(坐禪)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선행을 통해서 공덕을 쌓으라고 가르치는 종파와 선(禪)을 통해서 모든 고통과 근심에서 벗어나라는 종파로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모두 인간중심적인 구원방법입니다. 이에 반대되는 기독교는 하나님이 창조섭리 뿐 아니라 구원섭리에서도 주인이라고 믿습니다. 누구도 죄를 이길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죄로부터 인간을 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노력과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공로만으로 가능하며 이를 믿는 것만이 구원의 요체라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방법 같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믿는 것은 자신을 전부 다 내던지는 행위인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