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습니까? / 롬 8:31-39.
묵상자료 7012호(2020. 7. 28. 화요일).
시편 94:21-23.
찬송 3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 가운데, 한명이 친구에게 말합니다. “네가 요리하는 걸 좋아하니, 남편은 참 좋겠다.” 그러자 그녀는 이것저것 한참 맛있게 만들어 놨는데, 남편은 그냥 간장에 쓱쓱 비벼먹고 가는 편이야 라며, 먹는데 별로 관심 없는 남편에게 화가 난다는 듯 투덜거립니다. 그런가하면 프리랜서로 일하는 한 친구는 밤늦게까지 일하다보니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힘든데, 따뜻한 국과 함께 아침 아침밥을 꼭 먹어야 하는 남편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며 속상해 합니다. 결혼생활이란 이렇게 식성 하나만 해도, 서로의 차이를 양보해야 할 때가 있지요. 싱겁고 심심한 반찬을 좋아하는 여자와 맵고 짭짤한 걸 좋아하는 남자. 혹은 된장국만 좋아하거나 그 보다는 고추장을 꼭 넣어야 한다거나 김치 없이는 안돼를 외치는 사람과, 스테이크나 샐러드 같은 서양식이 좋다는 사람, 다행이 둘 다 미역국을 좋아하지만 고기를 넣어야 한다. 홍합 같은 해산물을 넣어야 한다. 취향이야 가지각색이지요. 그 뿐일까요. 텔레비전과 라디오 채녈 좋아하는 음식, 집안 장식과 색상. 한 사람은 너무 깔끔 떨어서 피곤하고 한 사람은 씻는 것도 치우는 것도 귀찮아 하니, 갈등을 빚고, 생활 곳곳 가치관 하나하나가 싸움이 될 수 있지요. 20, 30년 동안 전혀 다른 환경에서 각각의 개성으로 자라난 사람들이 만나서, 상대의 다른 점을 인정하는 과정. 밀고 당기고 타협하고 양보하고, 때론 희생도 하면서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게 결혼생활인데요. “내가 좋다하고 옳다 생각하는 것만 고집하며 다른 영역을 모르고 사는 것 보다 풍요로운 인생을 누리는 것이다.” 인생 선배들의 조언입니다. 어느 여성 학자에 따르면 이 넓은 세상 수많은 이들 속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몇 십 년을 지지고 볶으며 헤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함께 살아왔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이라고도 말하는 결혼생활. 영국 작가 토머스 플러의 이 말도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결혼 전에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보라. 결혼 후에는 한 쪽 눈을 감으라.”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년 9월 1일 방송>
2. “하나님의 사랑(31-39절)”을 읽었습니다. 질문과 대답을 같은 사람이 하고 있는 표현을 자문자답이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의 효과는 듣는 사람에게 신뢰를 줄 수도 있지만, 의문을 증폭시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옳은 말이든 그른 말이든 결국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이니, 먼저 양치기 소년 같은 가벼운 말이 아니라, 롱펠로우가 쓴 <화살과 노래>처럼 친구의 가슴속에 노래로 머물러 있다면, 전혀 다르게 마음에 와 닿을 것입니다. 요즘 자주 쓰는 줄임말로 언품이라는 게 있다는데 혹시 알고 계세요? 언어의 품격, 말의 품격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13차례나 자문자답하는 문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로 시작되는 사도의 자문자답은 말씀에 집중하게 됩니다.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셨으니 말입니다.” 한 마디 질문 속에 대답도 같이 들어 있는 표현입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도록 설명할 뿐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참 어려운 일이 사랑을 누리도록 하는 일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의 크리스천들이 직면한 가장 큰 고민거리일지 모르겠습니다. 귀가 닳도록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그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귀로만 듣고 있거나, 머리로만 이해하는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도 아니면 기분과 감정을 고조시키시는 경배와 찬양 시간에나 느끼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일상에서 누릴 수 있지 못하다는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사도는 아예 대 놓고 시편을 인용합니다.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 이런 현실을 살고 있지 않는 때문이었습니다. 주를 위한 환난도 역경도, 박해나 굶주림과 헐벗음도, 위험과 칼도 우리들 삶에서 찾을 수 없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