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하나의 목표 만이라도 열심히 주목하며 살 수 있다면. / 요 1:29-42.

박성완 2020. 8. 26. 00:00

묵상자료 7041(2020. 8. 26. 수요일).

시편 102:23-25.

찬송 52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시대는 바뀌고 주위 환경도 어지럽게 변하는데, 사람의 생각과 방법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어떤 때는 행운을 만나도, 어떤 때는 비운에 울게 됩니다.”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용어를 낳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이상적인 군주가 아닌 현실적인 군주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책에서 정치는 도덕의 위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교황청이 금서로 지정했고, 오랫동안 마키아벨리즘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함을 뜻했는데요. 그가 1513년에 이 책을 쓰고 있을 당시, 이탈리아는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처럼 뿔뿔이 흩어져 서로 전쟁에 전쟁을 거듭했던 극도의 혼란기였습니다. 급기야 프랑스의 침공을 받기에 이르는데요. 이런 총체적 난국을 타계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군주의 출현이 간절했고, 그런 바람으로 쓴 책이었지만, 어느 군주 하나에게도 영향을 주지 못하고 비웃음만 샀습니다. [군주론]에서 듣기에 껄끄럽고 해석이 분분한 구절은 이 구절입니다. “군주에게는 운명과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맞게 적절히 달라지는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이 시대에도 들어내 놓고 주장하기에는 파격적이지요. 원칙이 없다는 말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에 담긴 진의는 이렇습니다. 시대는 바뀌고 주위 환경도 어지럽게 변하는데, 사람의 생각과 방법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어떤 때는 행운을 만나도 어떤 때는 비운에 울게 됩니다. 다만 대 현자가 있어서 시대가 변하는 걸 재빨리 깨닫고 그것으로 여러 정황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내다보아 스스로를 그것에 대응시킬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언제나 행운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의 말은 사람들이 왜 운 타령을 많이 하는 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대가 변하는 걸 재빨리 깨달아 여러 정황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내다보고, 대응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대현자가 현실에 없어서, 그리고 스스로 그럴 능력이 없어 서지요. 시오노 나나미는 [나의 친구 마키에 벨리]에서, 그 말을 신랄하게 풀어냅니다. “그러나 그런 대 현자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은 언제나 가까운데 있는 것 밖에 보지 못하고, 그 결과 운에 좌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껄끄럽기는 해도 변화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반어법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5826일 방송>

 

2. “하나님의 어린양(29-34)”예수의 첫 번째 제자들(35-42)”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누구나 어떤 일을 할 때는 분명하건 희미하건 간에 목적의식을 가지고 일을 할 것입니다. 물론 매번 강렬한 목적의식이 뒤따를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제가 묵상자료를 작성해서 일정한 분들에게 보내드리는 것도 때론 습관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나름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고 자주 그것을 재확인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세상 정보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적어도 하루 30분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는 시간을 만들어 드리고 싶은 게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아직도 목회라는 걸 하고 있다는 강한 저의 자의식을 입증하는 표식이라 생각하는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욕심을 부리는 것이 있다면, 저와의 인연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는 욕심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의 매일 생활일기(배려가 있는 삶)는 매일 메일 묵상을 한 분들의 이름을 수기하는 란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낸 메일의 수신인 란에 며칠씩이고 묵상을 읽지 않은 분들의 이름이 쌓여가는 것이 저를 슬프게 합니다. 그래서 제 날치의 묵상을 하라고 협박성 경고를 보내기도 했고, 실제로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휴대폰으로 묵상한다고 해서 그런 줄 알고 있고, 어떤 이는 며칠에 한번 단 하루치만 클릭을 합니다. 한 마디로 얌체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숙제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라고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부모님을 떠올려 봅니다. 실천하지 않으니까 잔소리가 생기는 것이지요.

   세례 요한은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것과 함께 모든 부가되는 혜택을 다 거부하고 일생을 청빈하게 산 사람인 때문입니다. 저는 돈에 눈이 뻘겋게 달아오르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먹을 만큼 가졌고, 쉴 집 한 칸이면 족한데도 불구하고, 죽는 순간까지 돈을 쫓아 살아가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인 때문입니다. 심지어 신앙까지 이런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생각하는 때문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태어나면서부터 소명을 받았음을 알았습니다(1:5-25, 39-45, 57-80). 그는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예언한 말씀의 장본인으로 인식하고(40:3), 평생을 광야의 소리로 예수님의 앞길을 세상에 소개하는 삶을 살다가 죽은 것입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인기와 명성들을 다 걷어찬 올곧은 일생을 살아간 것은, 오직 이 소명을 완수한다는 목표 때문이었습니다. 한 번의 삶을 다양한 목표를 따라 살 수도 있겠으나, 하나의 목표만이라도 열심히 주목하며 살아간다면 더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