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베드로 설교의 강조점들. / 요 2:13-36.

박성완 2020. 8. 29. 00:00

묵상자료 7044(2020. 8. 29. 토요일).

시편 103:6-9.

찬송 8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글은 지난 17일자 한국일보 <삶과 문화> 칼럼에 실렸던 글인데, 너무 부끄러운 한국 개신교회의 민낯을 보게 하는 것 같아 함께 자성하며 깊은 생각을 해 보면 좋겠다는 뜻에서 일부를 소개합니다.

   지금 서울 확진자의 대부분이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사랑제일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다. 예배 때 방역 지침을 거의 어겼을 뿐 아니라, 무더기 확진이 나오는데도 신도들에게 진단 검사를 미루라고 종용까지 했다. 전광훈 목사의 반사회적 발언은 셀 수 없이 많다. “야외에선 코로나 감염이 안된다” “집회에 나오면 걸렸던 병도 낫는다는 비과학적 선동에 이어, 이번 대규모 감염 사태를 바이러스 테러라고 엉뚱한 음모론까지 퍼뜨렸다. 자신이 자가 격리 대상임에도 이를 어기고 기어이 15일 광화문 집회에 나가, 마스크를 벗은 채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신도들까지 대거 동원했다. 이 파괴적 맹신은 신천지와 똑같이 공화의 적이다. 나는 전 목사의 일탈이 개신교 일부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숱한 기행과 문제적 언동에도 개신교는 침묵하고 방조해 왔다. 그의 반사회성을 지적하는 책임 있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개신교계 전체가 이번 사태의 연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 개신교의 지나친 배타성과 세속주의는 늘 시민 사회 비판의 표적이 되어 왔다. 배타성이 자리한 곳에 기독교적 사랑과 관용이 깃들 수 없고, 세속주의가 득세한 곳에 영성이 싹틀 리 없다. 많은 목회자가 낮고 가난한영적 구원의 길 대신, 물신적 탐욕과 정치권력화의 길로 갔다. 기독교계의 추문은 잊힐 만 하면 들려왔다. 전 목사의 일탈은 이 풍토에서 자란 것이다.

   카리브해 아이티섬의 부족 추장이었던 아투에이는 스페인 침략자들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끔찍한 화형을 당했다. 죽기 전 스페인 종군 신부가 사후 천국에 갈 수 있다며 세례를 권했다. 아투에이가 물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아무 잘못 없는 나의 아내와 딸을 강간하고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빼앗은 이 군인들도 천국에 가는가?” 신부는 당연히 이들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 천국에 간다고 대답했다. 아투에이는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다. 이들이 없는 지옥이 바로 천국이다.” <이주엽 작사가, JNH뮤직 대표>.

 

2.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13-36)”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경이 계시에 의해 쓰인 말씀인 것을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위 기계적 계시론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공관복음서가 그렇듯 예수님의 한 일화를 모든 기록자들에게 똑 같이 불러주듯 쓰게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더라고, 듣는 이마다 자기 방식으로 듣는 것이지 똑 같이 듣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뉴스를 듣고도 어떤 사람은 소위 보수적으로 또 다른 사람은 진보적으로 듣습니다. 또한 성경학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1차 자료와 2차 자료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경우, 그 자신이 기록한 서신들은 1차 자료로, 그에 관한 말씀인 사도행전의 바울은 2차 자료로 분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2차 자료임에 분명합니다. 그 어디에도 베드로가 직접 말한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고 입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해를 가지고 베드로의 설교를 읽는다면 많은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던 설교라는 점입니다. 그것을 반증하는 것이 구약 인용입니다. 세 가지 주제로 설교하는데 그 모두를 구약의 말씀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강림의 현상에 대한 유대인들의 의구심을 요엘 선지자의 예언(3:1-5)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13-20). 이로써 설교의 전형적인 목적이 들어납니다. 설교는 어렵거나 알 수 없는 용어로 청중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으로 하여금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예수가 누구신지를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16:8-11)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21-28).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십자가에 죽었으나 부활하셨다는 것을 다윗의 증언으로 대신한 것입니다. 셋째는 부활신앙을 이미 다윗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16:10, 110:1). 부활을 증명하려는 것은 매우 힘들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어리석은 일일 수 있습니다. 이성적인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오직 신앙으로만 이해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부활여부를 논쟁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다윗의 신앙적 고백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접근법이고 설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