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받아 먹으라. 주님의 몸이라. 받아 마시라 주님의 피라.” / 요 6:52-59.

박성완 2020. 9. 14. 00:00

묵상자료 7060(2020. 9. 14. 월요일).

시편 105:14-16.

찬송 28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살다보면 애초에 갚을 수 없거나, 아무리 갚아도 줄어들 수 없는 필생의 빚을 안게 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소설가 이청준의 산문집 [인생]에는 일생 갚아야 하는 빚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작가가 20대 초반이었던 1960년대 어느 해 겨울 밤, 중학생 아이의 밤공부를 돌봐주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주머니에 버스비가 없었습니다. 군밤을 팔고 있는 청년에게 사정을 말하고, 버스비를 꾸어달라고 했다지요. 청년이 버스비 보다 많은 100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며 이렇게 당부했다고 합니다. “이 돈 몇 푼 갚을 생각 말고, 공부 열심히 하시오.” 청년의 그 말은 작가로 하여금 많은 걸 생각하게 했고, 여전히 그 빚을 짊어지고 사는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30대 후반 어느 날에는 비원 근처의 찻집에 앉아 있다가, 주문하지 않은 차가 날라져 왔습니다. 독자가 찻값을 미리 치루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이 때 차 한 잔은 작가에게 일생에 문학적 짐을 지워주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에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법한 에피소드도 떠올립니다. 잠시 종합운동장 앞을 지나다 김밥과 소주 생각이 나서 주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음식을 받아놓고 보니, 집에 갈 차비밖에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음식을 되돌려주려고 하는데, 머리 수건을 한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하며 작가를 다시 주저 앉혔다고 하지요. “그냥 드시고 갔다가, 나중에 지나는 길이 있으면 갚아도 좋고, 오실 일 없으면 말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아주머니의 가판대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어쩌면 정작 베푼 사람은 잊었을지 모릅니다. 작다면 작은 액수니까요. 무엇보다 돌려받기를 기대하고 베푼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따금 세상 참 살만하구나 하고 안도하고 감동하는 순간은, 그처럼 모르는 사람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게 친절한 마음을 베풀 때입니다. 우연히 지나치다 만난 사람이니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겁니다. 그래서 갚기도 힘들 겁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살다보면 애초에 갚을 수가 없거나, 아무리 갚아도 줄어들 수 없는 필생의 빚을 안게 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작은 신세짐에서라도 그것을 쉽게 갚을 길 없는 일에서, 더욱 그런 마음의 빚이 쌓이게 마련이다.” 마음의 빚을 안고 사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빚을 갚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비슷한 친절을 계속해서 베풀 테니까요. 세상사는 동안 마음의 빚 하나 없이 살기란 불가능한데, 우리는 그 빚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을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426일 방송>

 

2. “생명의 빵 3(52-59)”을 읽었습니다.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동시대를 살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하는 말에서부터, 인자(예수 자신을 호칭하는 용어)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다면, 영생을 누릴 것이고 마지막 날에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실제로 이 말씀은 훗날 기독교회가 로마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는 매우 중요한 원인 제공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에 덧붙여진 가짜 정보가 돌았으니 말입니다. 예수쟁이들은 사람을 잡아먹는 집단이라고 말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여러 세대가 지난 후, 곧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희생 혹은 대속(代贖)을 의미하는 상징적 혹은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하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서 하신 말씀이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기에 이런 이해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주님은 만찬에서서 빵을 들어 한 조각씩 주시면서, “받아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라.” 포도주를 주시면서, “받아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피라.”

그러니 이런 주님의 말씀에 화를 내고 야단법석을 떨었을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만일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다고 한다면, 우리라고 그들보다 나았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성찬 예식에서 집례 하는 분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면서, 예배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뭔가 원칙을 얘기할 책임의식을 느껴왔는데 적절한 기회겠다 싶습니다. 모든 기독교 예식은 가능하면 성경적 의미나 배경을 고려할 뿐 아니라, 성경구절을 택하는 것이 최선이다는 것입니다. 가령 성찬을 분배할 때, “집사님, 받아 드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몸입니다.” 라든지, “마시십시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는 식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찬을 받는 이가 누구든지 간에, “받아먹으라. 주님의 몸이라.” “받아 마시라. 주님의 피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