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축복. / 요 6:60-71.
묵상자료 7061호(2020. 9. 15. 화요일).
시편 105:17-19.
찬송 41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녀가 말했다. “짙은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독일 뮌헨의 슈바빙에 가고 싶다고 한다면, 십중팔구 전혜린이 아는 문학청년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소녀시절부터 절대 평범해선 안 된다는 명제를 지상과제로 삼았고, 모든 평범한 것, 사소한 것, 게으른 것, 목적 없는 것, 무기력한 것, 비굴한 것을 증오했던 그녀의 삶은,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10대와 20대들의 가슴을 뒤흔들었습니다.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는 오래도록 잔상이 남는 구절이 나오는데요. 이 구절이 1989년 해외여행 자율화 조치가 이루어진 뒤에 많은 젊은이들을 주저 없이 뮌헨의 슈바빙으로 이끌었습니다. “트렁크를 침대 밑에 넣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은 안 왔다. 열쇠로 방문을 잠그고 거리로 나갔다. 그 때 마침 가스등을 켜는 시간이어서, 다섯 시 경이었던 것 같다. 제복 입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좁은 돌길 양쪽에 서 있는 고풍 그대로의 가스등을 한 등 한 등 막대기를 사용하여 켜 가고 있었다. 더욱 짙어진 안개와 어둑어둑한 모색 속에서, 그 등이 하나씩 하나씩 켜지던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짙은 잿빛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내가 유럽을 그리워한다면 안개와 가스등 때문인 것이다.” 1955년 10월 그 때 전혜린은 스물 한 살이었고, 그로부터 10년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토록 스스로에게 잔인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추측들이 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뮌헨에 가지 않았다면 최소한 돌아와서 그곳을 그토록 그리워하지 않았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자유롭게 추구하며 살아가는 독일 여성들의 삶을 이미 봐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이 여성에게 순종과 정숙을 강요하는 근대였지요. 한 번 본 뒤에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풍경이 그렇고 어떤 만남이 그렇습니다. 그것을 보아버린 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전과 똑 같은 생각이나 감정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곳이 이국이 되고, 지금부터 살고 싶은 곳이 모국이 됩니다. 전혜린에게는 스물한 살 뮌헨에 도착한 첫날 저녁에 봤던,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년 3월 18일 방송>
2. “믿지 않는 제자들(60-65절)”과 “베드로의 신앙고백(66-71절)”을 읽었습니다. 첫 단락은 제자들 중에서도 여럿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어려워서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수군거렸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두 번째 단락에서는 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뒤따른다는 것이 절묘하지 않습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적어도 이성을 앞세우는 사람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불가사이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을 말씀하신 이후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황금기는 전환점 흔히 레임덕(lame duck)이 찾아온 것입니다. 더 이상 추종자들이 따르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제자들 외에 소수의 열성분자(?)들 외에 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너희도 떠나가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수천 명을 몰고 다니던 예수님 주변에 소수의 사람들만이 남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기(危機)를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위기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습니다. 참된 진리에 이르는 기회이며, 참된 제자가 되는 기회 말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공관복음서와(마 16:13-23, 막 8:27-33, 눅 9:18-22) 본문인 요한복음서에 소개되는데, 시간과 배경이 전혀 다릅니다. 공관복음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하신 말씀임에 반해, 본문은 가버나움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간 이후라 말씀합니다. 사실을 전하려 했던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서는 의미를 찾으려 했다고 하니까, 우선권은 공관복음서에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원형을 마가복음서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와 좀 더 구체적으로는 마태복음서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 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神性)과 사람의 아들이라는 인성(人性)을 가지신 분으로 믿는다고 말입니다. 신앙고백의 전형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은 축복임에 분명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