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어른이란 의무를 다하는 사람을 의미. / 요 7:1-13.

박성완 2020. 9. 16. 00:00

묵상자료 7062(2020. 9. 16. 수요일).

시편 105:20-23.

찬송 51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줄무늬 애벌레가 말했다. “삶에는 그냥 먹고 자라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 가 있지 않겠는가?” 그건 줄무늬 애벌레가 한 최초의 생각이었습니다. 애벌레가 알에서 깬 다음에 한 것이라곤, 나뭇잎을 먹고 또 먹고 자라고 크게 자라는 게 전부였습니다. 어떤 애벌레는 인생 뭐 있어?” 하면서 먹고 자라는 것 말고 아무것도 없는 양, 평생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줄무늬 애벌레는 생각이라는 걸 했습니다. “삶에는 그냥 먹고 자라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 가 있지 않겠는가?” 애벌레라서 쉬운 말로 했고, 같은 생각을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는 좀 더 철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그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왜 내가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사람도 애벌레도 지금과 같은 삶이 재미없습니다. 그래서 있던 곳을 떠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지만, 이상합니다. 황홀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트리나 폴러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 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이 책은 1975년에 국내에 초판 발행된 이후에,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데요. 오래전에 읽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이야기로만 기억한다면, 아무래도 다시 읽어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어른이라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애벌레들이 기를 쓰고 올라가려고 하는 커다란 기둥의 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기둥은 애벌레 더미였고, 아무도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올라가지요. 저렇게들 서로 올라가려고 야단인걸 보니, 굉장히 좋은 것이 있을 거라고. 어디로 가고 있는 지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 걸 보니, 좋은 곳일 거라고 믿을 뿐입니다. 틀림없이 말이지요. 그래서 다른 애벌레를 가차 없이 짓밟고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을 때 들려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꼭대기에는 아무 것도 없구나.” 그 곳은 단지 다른 애벌레들이 올라오고 싶어 하는 곳일 뿐이었습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다른 이들을 짓밟아가며 기를 쓰지 않아도, 높이 오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바로 나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애벌레가 나비가 돼서 날기보다, 기어 올라가는 방법을 택하는 이유는, 자기 안에 나비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니 어쩌면 그 기어오르는 일에 너무 바빠서, 이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삶에는 그냥 먹고 자라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 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 기를 쓰고 기어오르지 말고, 사뿐히 날아오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애벌레의 삶을 포기해야 하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51027일 방송>

 

2. “믿지 않는 예수의 형제들(1-9)”초막절 명절에 올라가신 예수(10-13)”을 읽었습니다. 첫 단락은 제자들에 이어 예수님의 육친들조차도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믿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언행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우회적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믿음의 길로 이끌지 않으면 사람 스스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유대인 남자는 13세가 되면 성인식을 갖게 되고 율법의 아들(바르 미츠바/Bar Mitzvah)라는 호칭을 얻게 되고, 유대인 여자는 율법의 딸(Bat Mitzvah)12세가 되면 성인식을 갖는다. 그런데 성인식을 가진 율법의 아들들에게는 몇 가지 의무가 지워지는데, 율법 준수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 성전세인 반세겔을 매년 바치는 것, 그리고 유대인의 3대 명절(유월절, 칠칠절, 초막절/16:16)에는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 등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초막절은 한 해 농사를 갈무리하고, 집 앞에 나뭇가지를 걸쳐놓고 엿새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출애굽 40년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절기를 지킵니다. 모든 절기의 중심엔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역사를 생활 속에 체화(體化)시킨 민족은 유대인들이 유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명절 지키기입니다. 우리의 역사적 기념일이 세종문화회관에서 몇 사람들이 모여서 지키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삼일절과 광복절 그리고 개천절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한 우리를 역사 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현충일에는 동작동 등 현충원을 찾아가서,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신 분들을 추모하는 정도는 해야 옳지 않나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