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해방둥이로 태어난 나는 해방의 여진과 6.25 동란 4.19 학생혁명, 5.16 군사구테타, 유신독재, 5.18 광주사태, 6.10 민주화 선언, 3.10 대통령 탄핵 등 역사의 굴직한 격랑 속에 살았다. 그러나 되돌아 보면 이 모든 역사적 파도들이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그 덕분에 나는 극심한 배고픔과 그와 비례하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하게 살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54년 5월 어느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다니던 장계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 장계 중학교 음악선생님에게 갔다. 중학교 음악선생님의 바이올린에 맞춰 <산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을 부르게 하신 것이었다. 날 계란을 아침마다 먹을 것을 권해듣고 며칠 후 군(郡)내에 있는 모든 초등학교에서 뽑혀온 실력자들이 자웅을 겨루는 군내 초등학교 학술 경연대회의 음악부에 참가한 것이다. 그 때 내 아버지는 유일하게 카메라를 목에 걸고 찾아오셔서 연신 셧터를 누르셨는데, 이사하는 과정에서 그 흐릿한 사진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 학술경연대회에서 우리 학교가 거둔 성과중 하나는 내가 성악부 1등을 한 것이었다. 난리가 났다. 첫째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우리 집에 모였고, 내가 방 한쪽 구석에 서서 1등을 한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학교 운동장에 모인 전체 학생 아침 조례시간에 교단에 올라가서 그 노래를 부른 것이다. 작은 우리 마을에서는 소문이 쉽게 퍼져나갔고, 교회를 비롯해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내가 받은 1등 상은 노트 20권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나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변성기가 일찍 찾아온 내 성대를 너무 혹사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뭇군이 나무를 질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준대요. 강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사공이 배를 젓다 잠이 들어도, 저 혼자 나룻 배를 저어간대요." 그 당시는 그 노랫말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는데, 지금 곱씹어 보니까 참 좋은 노랫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신앙적으로도 얼마나 귀한 깨달음을 주는 노랫말인지 모른다. 새삼 노랫말을 지어주신 윤석중선생님과 곡을 붙여주신 박태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는 종종 혼자 사는 세상인줄로 생각할 때가 많다. 아무리 부모님 사랑 선생님 은혜를 얘기하다가도,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불평 불만의 본색을 드러낸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하고 말이다. 젊은 시절에는 참 많이 했던 불평불만이었다. 그런데 이제 팔십줄을 눈앞에 둔 이즈음에야 그런게 아니었음을 제대로 배우고 있다. 나뭇군 경험이 있는 나 또한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어느 날 쓰러진 통나무를 리어커에 싣기 알맞도록 톱질을 하는데, 너무 힘이 들어 나무 밑에서 거꾸로 톱질을 하다가 그 톱으로 이마를 찍어서 피를 많이 흘린 일이 있었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던 3살 어린 동생이 달려와 제 셔츠를 찢어 이마를 감싸 동여매 주었기에 망정이지, 이마에 큰 상처를 남길 뻔 했던 추억이 있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이 "나 죽네. 나 죽네."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나무를 리어커에 싣고 집으로 오는 길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났었다. 피투성이가 된 몰골임에도 그 바람이 얼마나 시원했던지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혼자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아니라는 것을 배운 것은 그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뒤늦긴 했지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아마도 내가 대학 시험에 낙방하고 집에 머무르던 때였을 것 같다.
시원한 바람이 없다면 우리네 인생살이는 얼마나 팍팍할까? 고단한 삶에서 알게 모르게 이런 시원한 바람은 언제나 불어왔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만 하면 모든 문제가 일시에 다 해결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겨우 겨우 친척 식구들의 푼돈을 긁어모아 입학금을 내고나니까, 당장 거처할 방 한칸이 필요했고, 그게 해결되기가 무섭게 다음 학기 등록금이 걱정되었다. 어느 봄 날 가정교사로 2팀을 돌보고 다시 학교 도서관에서 문을 닫는 11시까지 숙제를 마치고 백양로를 걸어나오는데 하늘에 별들이 총총하고,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참 시원하고 고마운 바람이었다.
첫 목회지로 부산을 향해 떠났는데, 그때만 해도 교단 이름이 낯선 때문인지, 도무지 어른들이 교회를 찾지 않았다. 서너 달 교회가 위치한 개금 아파트에서 내려오는 직장인들을 상대로 전도지를 나눠주었지만 한 사람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다행히 아는 분을 통해서 교회 반주를 하고 싶다는 음악학원 선생이 오셨고, 교회 윗 마을에서 그 학원 선생과 또래인 처녀 한 분이 동생 서넛을 데리고 오셨다. 그래서 전도 대상을 노인과 어린이로 잡고, 노인정 두 곳을 집중적으로 찾아서 정보를 수집하는데, 그때 배운 것은 노인들은 고집 불통이라는 것이었다. 사탕과 우유를 사들고 찾아가서 마을을 위해서 그리고 노인들 자신을 위해서 뭔가 할 일을 찾아보자고 설득했지만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교사 자격증을 가진 덕분에 어린이 집을 쉽게 설립할 수 있었고 기대보다도 많은 아이들이 모여들어 작은 교회당은 매일 북적거렸다. 그런데 그때만해도 교회들이 자동차가 없던 시절이라, 30여명의 아이들과 학부모를 데리고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야외 학습을 나갔는데, 그곳에서 잘 짜여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우리 내외가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통에 아들 녀석이 대열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아내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아이를 찾아나섰는데, 해수욕장을 몇 바퀴나 돌았는데도 이 놈이 보이지가 않았다. 파도치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행여 아이가 그물결에 휩쓸려 떠올라올까 눈물을 쏟으며 뛰고 뛰었다. 아마 1시간 이상을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을 것이다. 다행히 미아보호소에서 얼굴에 온통 눈물자국과 모래를 뒤집어 쓴 아들을 발견했다. 그때 그 아이의 볼을 비비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아이 손을 잡고 아이들 곁으로 돌아오는데 파도를 가르고 바닷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었다. 얼마나 시원하고 고맙고 아름답던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고마운 바람이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고비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때마다 시원하고 고마운 바람은 항상 내게로 불어왔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아마도 열심히 달리기를 한 사람이나, 땀으로 온 몸을 적신 사람들은 이 바람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힘든 인생살이를 살고 있는 사람만이 산위에서 그리고 강위에서 부는 바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버거운 삶이라 하더라도 산위에서 그리고 강위에서 시원하고 고마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