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차원에서 신앙의 차원으로. / 요 12:20-26.
묵상자료 7083호(2020. 10. 7. 수요일).
시편 시 106:47-48.
찬송 43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소중한 딸 화영에게> 화영아, 엄마야. 어제 잠깐 이야기 하다가 네가 친구랑 약속이 있다면서 뛰어나가는 바람에 끊겼었지. 그냥 넘어갈까 싶었다만 아무래도 침묵 속에 오해 하나가 더 쌓여가는 것 보다는, 마찰이 좀 잇더라도 그걸 풀어나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편지 쓰는 거야. 너 휴대 전화 요금에 대해서 엄마가 말을 꺼내자마자, 뒷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급하게 네 할 말만 하더구나. 이번에 조금 나온 건 사실이지만, 친구들도 다 이만큼 씩은 나온다. 나만 특별하게 많이 사용하는 거 아니다. 하지만 조금 더 줄여보려고 노력은 하겠다. 그래 얼핏 들으면 논리적이면서 엄마 의견도 받아들이는 것 같은 모범 정답형 대답이야. 그런데 어찌 엄마에게는 그 대답이 공허하게만 들렸을까?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담아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단번에 척 내 놓은 인스턴트 모범 정답처럼만 들렸을까? 엄마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요금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일 거야. 요즘에 넌 빈 시간만 나면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거나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곤 하더라. 그러면서 동시에 음악도 듣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즐기는 널 보면, 그야말로 멀티형 신세대 전형 같아 보이기도 해. 그런데 화영아, 귀한 네 휴식시간을 몽땅 바칠 만큼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느라 그렇게 바쁜 거니? 딱히 그래서가 아니라, 빈 시간을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그래 엄마는 구세대라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따지는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구나. 맞아, 엄마는 구세대야, 그런데 구세대 감각으로 신세대인 널 보면, 마치 띄어쓰기가 한 군데도 안 돼 있는 글을 읽는 것처럼 정신이 없어. 휴대전화 이야기 꺼내면서 엄마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거야. 한 템포만 느리게 띄어쓰기도 해 가면서, 너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가져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 휴대 전화 요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쪼개지고 버려지는 네 시간이 아까워서지. 엄마는 네가 네 자신과도 좋은 친구처럼 잘 지냈으면 싶거든. 말로 하면 또 잔소리가 되기 때문에, 일부러 편지를 썼어.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8월 19일 방송> a.
2. “예수를 찾아온 이방인들(20-26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방인들은 그리스(헬라)에서 온 사람들로 유대인의 성인이 지키는 의무에 따라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고 올라온 소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성령 강림을 체험하였던 수많은 외국인들 역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스에서 온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방의 영향 때문인지,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만나 뵙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합니다. 어쩌면 철학적인 질문과 함께 예수님의 언행이 너무도 겹치는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철학의 물음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인물로 예수님을 기대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은 진정성 있는 자세로 말씀하셨는데, 저 유명한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거두는 원칙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인데 반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잃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할 뿐 아니라, 영원히 살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은 매우 낯설고 역설적이었던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썩어서 새 싹을 돋게 하고 많은 열매를 거두는 것은 농부를 자연계의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명이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영원한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철학의 한계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철학은 죽음이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하는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한 알의 밀알의 비유를 통해서, 인간의 죽음 너머를 유추할 수 있도록 생각의 지평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그리고 느끼는 것이 전부라고 믿고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한 알의 밀알 비유>는 또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도록 눈뜨게 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이 지점이 신앙의 문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철학에서 신앙의 차원으로 발전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잘 들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