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다가서야 할 선교. / 살전 2:13-20.
묵상자료 7139호(2020. 12. 2. 수요일).
시편 시 119:1-4.
찬송 26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명진 씨에게> 며칠 전 영화를 보면서 모처럼 명진 씨 생각을 했었지요. 그리곤 그런 제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깜짝 놀라기도 했답니다. 우선 명진씨 생각을 하면서, 예전처럼 더 이상 가슴이 따끔거리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왔고요. 또 예전 같으면 어김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잇을 제가, 슬그머니 웃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또 한 번 놀랐지요. 영화 속 중인공이 일방적으로 자기에게 헤어지지고 한 남자에게 편지를 써 보려고, 그렇게 애써 화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장면이었어요. 처음에는 “사랑하는 누구씨” 이렇게 시작했다가 한참 망설이더니, “사랑하는” 이라는 수식어를 싹싹 지우지요. 그리고 또 몇 자 쓰다가 지우고, 결국 편지를 쓰지 못하고 울어버리는 장면이었어요. 어쩜 1년 전만해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헤어지는 연인들만 나와도, 눈물부터 나와서 차마 끝까지 볼 수 없었던 제가 그걸 잘 보고 있더라고요. “아, 저거 너무 리얼해 예전에 나도 그랬었는데”, 이런 생각까지 할 정도로 여유까지 부리면서요. 그래서 알았어요. 제가 정말로 치유가 됐다는 거. 상처위에 제대로 새 살이 돋아서 그 부위를 다쳐도 하나도 아프지 않은 상태라는 걸요. 아마 그래서 이 편지 쓸 용기를 얻었을 거예요. 헤어지자고 한 명진 씨를, 절대로 죽어도 아니 죽어서도 용서 못한다고 한 제 말 심했었지요. 그 땐 그 마음이 아마 제 진심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잘 치유된 지금 제 진심은 좀 다르답니다. 이제사 그건 용서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느껴지는군요. 모든 앙금이 다 가라앉고 나니, 맑게 고인 옛 추억들이 아름답다고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이런 맑은 마음이면 다시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을 거라는 느낌도 차오르고요. 명진 씨도 저와의 기억이 좋은 거름으로 작용해서 더 알찬 열매를 맺는 그런 인연 만나시기 바랍니다. 아니 벌써 만났는지도 모르겠군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12월 2일 방송> a.
2.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2(13-16절)”과 “데살로니가로 다시 가려는 바울(17-20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코로나19 대유행은 여러 면에서 우리들 삶에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저의 경우는 타종교 방송을 예전보다는 훨씬 더 많이 시청하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서 평화방송은 설교나 예배 중심의 우리 개신교 방송보다는 다양한 주제들로 시청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한 신부님이 이른바 소확행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요즘 그리운 것이 무엇이냐?”고 참석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코로나19 이전의 평범했던 삶이라고 했습니다. 거리낌 없이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 맞춰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등등의 이야기였습니다. 가끔 우리는 그렇게도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학창시절과 가난했던 삶이 그립기도 하고 아름답게도 떠오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과거가 그리워도 다시 돌아가겠느냐고 묻는다면 망설이거나 아니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한번으로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오늘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시 방문해 보고 싶다고 말씀합니다. 힘들었던 시절을 뻔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바울을 우리와 너무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일까요?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벌써 두 번이나 가려고 시도했지만 사탄이 길을 막았었다고 술회합니다. 몸의 거리와 마음의 거리를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전자는 물리적 거리를 후자는 영적 거리를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얘기합니다.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백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관계를 의미하는 면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신앙은 손에 쥐는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손에는 쥘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가치에 무게를 두는 때문입니다. 그동안 신앙 서클에서 자주 회자되는 각종 문제들은 신앙의 관계가 아니라 이해의 관계에서 출발한 문제들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사도의 말처럼,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주님 앞에서 누릴 희망과 기쁨을 얘기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누릴 승리의 월계관을 노래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움이란 고난과 역경의 시절을 추억할 뿐 아니라,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만난 80대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교회가 이래도 됩니까?> 라는 책을 쓰셨는데, 누구도 좋아하기 힘든 책망과 비판으로 일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내용으로 선교하신 모양입니다. 기대 밖의 내용이어서 당황했을 선교지의 풍경을 그려봤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 속에는 진심과 사랑이 담겨있었습니다. 마음으로 다가선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