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봉사가 아니라 신앙이 최후의 목적이 되기를. / 살후 1:1-12.

박성완 2020. 12. 9. 00:00

묵상자료 7146(2020. 12. 9. 수요일).

시편 시 119:25-28.

찬송 42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의 한 발표에 의하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였습니다. 벌써 연속 3년째이지요. , 비엔나의 아름다움과 예술적인 환경 등은 워낙 유명합니다. 굳이 살기 좋은 곳 1위라는 순위가 아니었다 해도, 그 대도시의 대단함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도시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여행할 때 느끼게 되는 부러움이, 새삼 다시 기억나네요. 하지만 그런 비엔나에서 살았던 오스트리아 작가 중에는, 오스트리아를 그리고 빈과 잘스부르크 같은 도시들을 너무나 혐오하고 비난했던 작가도 있었습니다. 희곡작가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얼마나 미워했던지, 죽기 전에 유언장에 썼을 정도였지요. “내가 죽고 나서 자작권이 유효할 동안에는 오스트리아 내에서 절대 나의 작품을 출판하거나 공연하거나 낭송도 해서는 안 된다. 오스트리아는 절대 내 일에 아무 것도 관여해서는 안 된다.” 라고요. 그는 [옛 거장들], [소멸] 등의 소설을 쓴 작가 바로 토마스 베르나르트였습니다. 베르나르트는 세계 대전 등을 겪으면서, 자신의 조국인 오스트리아가 제국주의의 침략행위에 가담한 것에 극도의 실망과 분노를 느끼고는, 끝없이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비난하고 혐오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 속에도 빈이나 잘스부르크 같은 아름다운 도시들은, 수시로 환멸스러운 도시들로 그려지곤 했습니다. 도시든 그 안에서의 삶이든, 조금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과 그 안에서 살면서 바라보는 게 다르고, 그 안에서도 또 내가 보는 것과 내 옆 사람이 보는 게 다를 수 있겠지요. 그러니 가끔 외국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다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서의 직접적인 삶이란 서울에서의 삶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이토록 마냥 좋기만 할 것 같은 도시에서의 삶에도, 세상 어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울고 웃고 힘들고 행복하고 하는 감성들이 뒤섞이곤 할 거다.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1126일 방송>a.

 

2. “인사(1-2)”주님의 심판(3-12)”을 읽었습니다. 19세기 초부터 비판적인 학자들 사이에서는 데살로니가 후서가 바울 사도의 저작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전서와 후서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발견되는 때문입니다. 크게 셋으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종말론의 이해가 다르고, 둘째는 문학적 표현이 다르며, 셋째는 신학적 이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종말론의 이해가 많이 다른 점이 강조되는데, 전서가 임박한 종말론을 말하고 있다면, 후서는 종말 이전에 일어날 일련의 사건들을 강조함으로 임박한 종말론이 뒤로 후퇴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그동안 종말론의 시비는 줄기차게 대두되어 왔는데, 곧 주님께서 오실 것이라는 임박한 종말론과,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아실 것이라는 미래적 종말론, 그리고 이미 종말은 우리 가운데 실현되었다는 실현된 종말론이 그것입니다. 이런 주장들은 시대별 차이만이 아니라, 사람들에 따라 제각기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느 종말론이든 그 나름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학자들에게 넘겨주기로 하고, 우리는 다른 성경말씀들과 마찬가지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 의미를 질문하고 묵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습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겪었던 고통과 시련을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지키려고 힘썼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것은 충분히 자랑할 만한 것임을 보증하고 있고,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자격을 갖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 격려합니다. 실제로 신앙인이든 불신앙 인이든 시련을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시련의 대부분은 믿음과는 무관한 것들입니다. 사람 사이의 갈등이나 실수로 인한 물질적 정신적 손해 등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겪었다는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받게 되는 시련이란 무엇일까요? 며칠 전 한 유명 개신교인 가수가 재능 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불교 행사에 참가했던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봐 주는 일에 종교인들이 서로 도우며 참여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자칫 봉사가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불교와 연대할 때는 확실한 선 긋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봉사라는 열매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봉사가 신앙으로 나타나야 옳은 것입니다. 봉사를 위해서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생활을 위해서 시련을 겪기 보다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시련을 기쁘게 당해야 옳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