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신앙 만이 기적에 참여할 수 있다. / 요 4:46-54.
묵상자료 7176호(2021. 1. 8. 금요일).
시편 시 119:145-148.
찬송 40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인물 햄릿이 한 말이지요. 그렇다면 햄릿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에 이어서 햄릿이 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잔인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참는 것이 더 고상한가? 아니면 고난의 물결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워 이를 물리쳐야 하는가? 죽는 것은 잠자는 것, 만일 잠자는 것으로 육체가 상속받은 마음의 고통과 육체의 피치 못할 괴로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심으로 바라는 바로다.” 결국 햄릿이 원한 것은, 마음의 고통과 육체의 괴로움의 끝이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잠드는 것이었고, 잠이 들면 꿈을 꾸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꿈 때문에 죽음 역시 고통의 끝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죽음이라는 잠으로 인해서 육체의 굴레를 벗어난다 해도 어떤 꿈들이 찾아올지, 그게 문제다. 이것이 우리를 주저하게 만들고, 그것 때문에 이 무참한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과 변함없는 사랑의 쓰라림을 참겠는가? 햄릿은 말합니다. 햄릿은 훗날 또 어떤 꿈을 꾸게 될까? 바로 이 때문에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게 되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4년 1월 14일 방송>
2.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46-54절)”을 읽었습니다.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을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 말합니다. 앉은뱅이가 걸어가고, 암환자가 깨끗이 낫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듭니다. 제가 목회하는 동안 지긋지긋한 병마와 싸우던 교우들이 너무도 소원하여서 그런 곳을 함께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포천의 할렐루야 기도원과 가평의 한얼산 기도원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도 조용해서 놀랄 정도입니다. 제가 대학 2학년 때 수색에서 2년간 전세살이를 했는데, 같은 2층 옆집에 박태선 전도관에 다니는 모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따님이 중병에 걸려 거동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신학생인 제게 기도를 부탁해서 방문했을 때,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습니다. 박태선 장로가 안수한 물을 먹거나 바르기만 하면 만병통치라고 하는데, 어찌하여 그 성수를 쓰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때 듣게 된 대답은 초신 자에게는 효력이 있지만, 자신들처럼 오래된 기신자에게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신앙의 길이니 말입니다. 60, 70년대의 한국 상황에서는 가능했지만, 21세기에서는 신유의 은사가 맥을 못 출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시니컬한 얘기입니다.
갈릴리 가나는 물로 포도주를 만든 첫 기적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둘째 기적도 가나에서 일어났다고 오늘 본문이 말씀합니다. 두 번째 기적은 신앙의 다른 차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과 포도주라는 유형의 매개체가 있는 것에 반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가버나움의 고관(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일화는, 직접 안수를 하거나 만져주는 것과는 다른 보이지도 않은 대상을 향해 “네 아들이 살 것이다.”고 말씀만 하셔서 고친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고도, 시공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유의 역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시겠다 하시면, 기적은 언제든 어디에서든 가능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주님의 자비와 은총에 맡기는 오직 신앙만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