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은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 / 막 2:13-22.
묵상자료 7183호(2021. 1. 15. 금요일).
시편 시 119:173-176.
찬송 33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몰라, 두 손에 호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참는 까닭입니다. 윤동주의 <길>이라는 시 입니다. 윤동주는 이 시를 1941년 9월 연희 전문학교 3학년 재학 중일 때 썼지요. 해방되기 전입니다. 따라서 무얼 어디에 잃어버렸는지 모른다고는 했어도, 그게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윤동주는 희망을 길 위에서 찾고자 했는데요. 길 위의 시인 신경림도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게는 길만이 길이 아니며,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통해 바깥세상을 내다 볼 수 있었고, 또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4년 1월 22일 방송>
2. “레위를 부르심(13-17절)”과 “단식에 대한 질문(18-22절)”을 읽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세리로 마태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습니다(눅 5:27-29). 오늘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단식이란 금식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우리에게는 더 익숙한 용어인데, 신앙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도 현역 시절에는 년 초에 3일 금식을 자주 했었는데, 두 가지 목적을 두고 했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연약함을 강제로 깨닫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성경을 일독할 기회를 갖기 위함이었습니다. 언제나 그 목적들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산리 순복음 금식 기도원을 주로 찾았는데, 그곳에 혼자 들어가 기도하거나 성경읽기에 잘 준비된 기도 토굴이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금식 혹은 단식이란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택하는 신앙생활의 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위한 도구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단식에 대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세파 사람들이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을 자주 하는데, 우리는 왜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이 질문의 배경에는 금식을 신앙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구성요소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정상적인 신앙인이라고 하면 금식은 마땅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도가 지나친 사람들은 금식하는 것을 자랑거리로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히려 금식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슬픈 기색도 내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6:16-18).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단식 혹은 금식은 신앙생활의 한 가지 내용일 수는 있지만, 반드시 어떤 좋은 목적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을 때 교만하기 쉬운데, 이런 사람에게 금식이 딱입니다. 사흘만 금식하면 겸손 모드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째로 한번 읽고 싶을 때는 사흘 동안 금식하며 성경을 읽기에 아주 좋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남들이 금식하니까 따라서 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남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도구였다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함께 지내는 목적이 있는 금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는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와 같은 처지로 금식이 가당치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때와 장소 혹은 형편에 맞는 신앙생활이어야 하겠습니다. 기쁨이 가득한 신혼부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붙이는 비유를 곁들이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목적과 수단에 대해서 깊은 묵상이 뒤따라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