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적 이해가 아니라 맥락적 이해가 필요. / 막 3:20-35.
묵상자료 7187호(2021. 1. 19. 화요일).
시편 시 121:5-8.
찬송 23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795년 정조는 생모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생부 사도세자의 묘소를 방문했습니다. 이 해는 혜경궁 홍씨가 환갑이 되는 해였죠.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효심이 지극한 왕으로 꼽히는 정조는, 어머니 회갑을 맞아 아버지 묘소에서 성대한 회갑잔치를 열고 돌아왔습니다. 이때 8일간의 행차가 단원 김홍도에 의해서 그림으로 남겨져 전해오고 있는데요. 김홍도는 자신을 따르던 화가들을 데리고, 8장면으로 구성된 정조의 나들이 모습을 남겼습니다. <능행도>라고 하지요. 언젠가 어떤 사람이 이 그림 한 폭에 그려진 사람을 세어보았더니 1500명이 넘고, 말의 수가 500여필이 넘더라고 할 정도로 정조의 행차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기쁘게 하고자 제작토록 했던 이 그림은, 오늘날 당시를 재현하는데 최고의 교과서로 쓰이고 있죠. 복식에 있어서도 <능행도>를 토대로 고증을 하고 있고, 추 고수는 앞에서고 새 악수는 뒤에 선다는 것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서 제작했던 이 <능행도>가 지금 과거를 고증하는 교과서처럼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미래에 또 어떻게 재해석될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4년 1월 27일 방송>
2. “바알세불과 성령(20-30절)”과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이냐?(31-35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가 모두 취급하는 구절로(마 12:46-50, 눅 8:19-21),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까닭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첨예하게 해석의 차이를 보이는 때문입니다. 아마도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로 추정되는 어느 날, 예수님의 육친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전갈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하시고, 말씀을 들으려고 둘러 서 있는 무리를 보시면서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훗날 누가복음서 기자는 해석을 붙였는데,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이들이라.”(눅 8:21)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하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예수님이 당신의 육친을 비하하려고 하신 말씀이 아닌 것은 물론, 일부 개신교인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평범한 한 히브리 여인보도 못하게 경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 개혁 당시의 루터나 쯔윙글리 그리고 깔뱅 등은 모두 마리아에 대한 한없는 존경과 경의를 표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참고/ 쯔윙글리의 신앙해설이란 논문, 깔뱅의 복음서 주석.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뜻은 모친 마리아를 경멸하거나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주님의 육친들이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표현이나 의미는 마르다가 식사를 준비할 때 한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 턱밑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던 마리아를 보시며 하신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눅 10:38-43).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 이외에 다른 말씀을 첨가하거나 윤색해서 의미를 바꾸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하겠습니다. 가령 이 본문에 있는 말씀을 과도하게 해석하는 일,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에서 형제들을 사촌들로 바꾸어 말하는 것은 지나친 월권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신부님의 말처럼 형제라는 단어 아델포스가 사촌을 포함하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오해가 될 만한 단어나 구절을 성경 기자들은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테니까 굳이 그런 오해의 소지를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말씀이 갖는 참 의미를 포착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는 귀를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혈통적인 관계를 내세우거나 자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잘 듣는 일은 소리나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맥락적 의미 곧 그 중심점을 찾아서 들으려는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정치가들처럼 충분한 설명과 이해를 뒷받침하는데도 불구하고 거두절미하고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그런 악한 모습은 버려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3.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서한규 지음을 추천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