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그 스스로 죄를 이겨낼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 막 9:42-50.

박성완 2021. 2. 9. 00:00

묵상자료 7208(2021. 2. 9. 화요일).

시편 시 132:5-7.

찬송 20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 맹자의 말입니다. 항산은 살아갈 수 있는 일정한 재산, 생업을 뜻합니다. 항심이란 흔들리지 않는 마음, 늘 지니고 있어 변함이 없는 마음을 의미하지요. 한 수필가는 여기에서 항산을 행복의 조건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또 항심을 행복이라는 말로 옮겨놓아도 의미의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행복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 이 말도 옳다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맹자 역시 선비는 항산이 없어도 항심은 있다. 고 단언을 했습니다. 행복해질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해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했는데요. 왜냐하면 행복은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 행복의 조건이 객관적 요소라고 한다면, 행복을 느끼는 행복감은 주관적 요소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명성이 높고, 좋은 가정을 갖고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달과 같습니다.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슬프게 정답게 혹은 허무하게 느껴지는 밤하늘의 달. 오늘 행복의 달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4223일 방송>

 

2. “죄의 유혹(42-50)”을 읽었습니다. 지난주일 TV로 설교 몇 편을 시청하였는데, 단골 메뉴처럼 죄에 대해서 언급하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식상하리만큼 죄와 그 죄의 폐해를 입에 붙은 말처럼 말하고 있었습니다. 죄가 무엇이며 그 심각성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죄란 목표를 빗나가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죄의 가공할 위력이란 빗나간 삶의 방향성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멈추거나 그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계속해서 연쇄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후에는 계속해서 죄의 내용과 무게가 증식되었다는 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죄로 관영(貫盈)했다고 개역성경은 번역했는데, 죄의 전체성과 지속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한번 죄를 짓게 되면 멈추게 할 수 없어서, 죄지은 손과 발 그리고 입술과 눈을 자르고 빼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지옥으로부터 천국으로 가는 첫 걸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길은, 죄를 범한 손과 발, 눈과 귀, 입과 코를 다 베거나 빼어 버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거기다 미움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거나 음욕으로 불타오른다고 하면, 우리의 머리와 심장까지 다 죽여야 할 테니, 결국 우리 육신은 어느 한쪽도 살아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해 낼 수 있겠느냐?”고 탄식했던 것입니다(7:13-25).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도대체 죄의 유혹을 이기며 살아갈 수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죄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 성경적 대답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순 없다는 것과, 죄의 근원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이라고 말입니다.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해서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우리는 죄로 가득 찬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예찬>을 쓴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를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죄 많은 세상에 나서 죄를 모르고, 부처보다도 예수보다도 하늘 뜻 그대로의 산 하느님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무 죄도 갖지 않는다. 아무 획책(劃策)도 모른다.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먹어서 부르면 웃고 즐긴다.” “나는 지금 성당에 들어간 이상의 경건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자는 얼굴에 예배하고 있다.” 그런데 방정환선생은 어린이가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그 어미의 젖을 깨무는 것은 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조금 자란 후에는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곁에 둔 장난감이며 심지어 젖병까지 내 던지는 모습은 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인간의 죄가 그 얼굴에 쓰여 있는 게 아니라 그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것임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어린이 역시 죄 된 욕망의 노예였던 것입니다. 그 욕망이란 이기적인 것이고 파괴적인 것임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타인은 배려하고 나누고 섬기는 윤리적인 욕망이란 오랜 배움과 훈련이 뒤따라야 한다는 걸 몰랐던 모양입니다.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죄의 짐을 대신 떠안으신 우리 주님을 믿기까지는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