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에 충실했던 세례자 요한. / 요 1:19-28.
묵상자료 7215호(2021. 2. 16. 화요일).
시편 시 135:1-3.
찬송 19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눈이 아주 많이 내린 날, 숲에 가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습니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함박눈이어도 하늘에서 내리는 흰 눈은 얼마나 가벼운지요. 먼지보다 더 가벼울 듯합니다. 그런데 그 가벼울 것 같은 눈들도, 쌓이면 어느 덧 굉장한 무게가 돼,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는 겁니다. 꽃잎도 눈 못지않습니다. 꽃가지가 더해졌다 한들 역시 가볍지요. 그리고 꽃은 아름다운과 여인의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꽃이 등장하는 그림들은, 항상 산뜻하고 화려하거나 향기롭습니다. 꽃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인들은 물론, 거리에서 꽃을 파는 소녀나 여인들이 등장하는 그림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에서라면 고되고 힘든 일일 텐데, 그림 속에서 꽃수레나 양동이에 담은 꽃을 파는 여인 소녀들도 한결같이 아름답고 화사합니다. 하지만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에서만은 예외입니다. 디에고 리베라의 이름이 우리에게 친숙해 진 것은,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라는 점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의 피카소로 불리는 화가이자 벽화가 입니다. 멕시코 혁명을 기록한 그의 벽화는, 지금도 멕시코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벽화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거칠고 현실적인 혁명을 주제로 한 벽화를 많이 그린 벽화가 답지 않게, 꽃이 등장하는 그림도 많이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 꽃들 역시 디에고 리베라다운 관점의 꽃들이지요. 그의 그림 속 꽃들은 아름답고 가벼운 장식물이거나 감상 품이 아닙니다. 매일 실어 나르고 옮기고 팔아야 할 가난한 사람들의 고된 생계 수단이자 일상의 무거운 무게입니다. 1935년 작품인 <꽃을 나르는 사람>은 그런 꽃의 무거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한 남자가 끈으로 묶은 지게를 지고 막 일어서려는 중입니다. 하지만 지게의 무게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듯, 두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두 손도 땅바닥을 짚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혼자 힘으로는 일어서기 힘든지, 뒤에서 한 여인이 지게 밑을 받쳐 올려주고 있습니다. 남자의 지게 위에 가득한 무거운 물건은, 다름 아닌 꽃들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2월 16일 방송>a.
2. “세례자 요한의 증언(19-28절)”을 읽었습니다.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한 신흥 지도자가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데, 그의 출신 배경과 신학적 노선이 불분명한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유대 종교가 가르쳐 온 것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대중 집회의 규모가 전무후무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점이고, 둘째는 회개의 세례를 시행하고 있는 점인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요단강변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그의 행색이 일반 종교지도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점도 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들은 몇 사람의 제사장과 장로들을 보내 세례자 요한의 정체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질문의 핵심은 메시아(헬라어로 그리스도) 여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끈질긴 질문에 돌아온 분명한 대답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정체였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세례자 요한에게서 애매모호한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조금 더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왜 세례를 베푸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알쏭달쏭한 대답을 듣게 됩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 뿐이지만, 여러분 중에 계시는 그 분은 자신이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입니다(공관복음서에서는 그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마 3;11, 막 1:8, 눅 3:16). 요한복음서가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뒤늦게 편집된 것을 감안한다면, 물세례와 성령세례 사이에 수정이 필요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요즘처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성령세례를 남발하는 것을 멈출 요량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요한복음서가 이 대목에서 강조하는 것은 자신과 자신이 광야의 소리꾼으로 자처하는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는 완전히 차별되는 분임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그리스도로 오해하는 잘못을 사전에 차단하려한 의도라고 말입니다.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할 수 있는 한 과대 포장하고 그 프리미엄을 얻으려는 얄팍한 시대에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을 낮추고 업신여기도록 힘쓴 세례자 요한이 자기 소명에 충실한 위인이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참에 우리가 본받고 따르기에는 세례자 요한에 방점을 두는 게 옳지 않나 생각하게 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