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악마와의 전쟁에 앞장서신 예수. / 요 7:1-13.

박성완 2021. 3. 6. 00:00

묵상자료 7233(2021. 3. 6. 토요일).

시편 시 137:1-3.

찬송 39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눈이 나빠서 하게 되는 실수들, 정말 많고도 또 불편합니다. 철학자인 데카르트는 모든 인생살이는 감각에 의존하는데, 그런 감각 중에서도 가장 포괄적이고 귀중한 것이 시각이기 때문에, 안경이 그런 능력을 증대시키는데 기여한 발명가운데, 가장 유익한 것 중의 하나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면서 안경을 적극 예찬했었지요. 하지만 안경을 발명한 사람이라고 추정되는 그 사람의 묘비에는, 뜻 밖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안경을 발명했습니다. 신이여, 그의 죄를 용서하소서!” 안경을 발명한 것이 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일이었던 겁니다. 안경이 신에게나 가능할 것 같은 일, 그러니까 눈앞의 시야를 완전히 바꾸어주는 신비롭고도 혁신적인 것인 것이었던 겁니다.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발명품인 거지요. 오스트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프리덴 슈리히 훈데르트 바소 역시, 그런 안경 때문에 신세계를 경험한 예술가 중의 하나입니다. 다만 자신이 안경을 쓰면서 새롭게 발견한 신세계가 아니라, 안경을 쓴 사람을 보면서 느낀 신세계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다리 위를 지나가다가, 맞은편에서 오는 선글라스 낀 사람을 봤지요.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선글라스 안경이라는 것을 태어나서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안경이 갖는, 세상을 새롭게 다르게 보게 하는 능력이, 갑자기 아주 신기하고도 신비롭게 다가온 겁니다. 예술가나 화가로써 새로운 영감이 찾아 들었든 거겠지요. 그날의 영감을 갖고 그는 <스펙터 클래식 인어 스몰 페이스/ 작은 얼굴의 안경>을 그렸습니다.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도는 커다란 안경이 가득 메우는 그런 그림이지요. 안경을 통해 뭔가 신세계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한, 감동의 눈물이라도 흘리는 듯한 얼굴입니다. 사실 훈데르트 바소의 그림이나 건축이야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표정을 짓게 합니다. 굉장히 밝고 강렬한 색채와 형상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그가 건축한 <쓰레기 소각장>의 외부는 훈데르트 바소 특유의 밝고 동화적인 색채와 조형으로 가득합니다. 쓰레기 소각장이 아니라, 꿈의 건축물 같아서, “, 저런 집에서 살아도 좋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실제 안경을 끼고 든, 보이지 않는 안경을 걸치고 든, 세상을 새롭게 보거나 발견하는 그 기쁨과 환희야말로, 무엇에도 견줄 수 없이 크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36일 방송>b.

 

2. “믿지 않는 예수의 형제들(1-9)”초막절 명절에 올라가신 예수(10-13)”을 읽었습니다. 성인 유대인 남자는 매년 성전세(반세겔)을 내야하고, 3대 명절(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단락은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형제들이 믿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서로간의 불신이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하나님의 아들로써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나사렛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6:1-6), 나다나엘 호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도 그런 현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형제들은 비웃기조차 하는 어조로 빈정거리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는 당신의 때가 오지 않은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으로부터 당신이 미움을 받는 것은 사람들의 악을 들추어내는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른바 악마와의 전쟁을 하고 계신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싸움을 피하고 분쟁이 일어날 만한 일에 대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제가 5공화국 시절에 단기 유학을 위해 세인트루이스에 머물고 있었는데, 저를 많이 도와준 교포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어찌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이 군사정부와 싸움질을 하느라 교회를 제대로 돌보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명한 몇 분 목사님들을 거명하면서 얼마나 점잖고 덕스럽게 목회를 잘하고 있지 않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났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앞장서서 반정부 활동은 못하지만, 그런 일에 앞장서서 일하시는 분들을 교회에 모셔서 강의를 듣는데도 사복 경찰들이 항상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어서 얼마나 위압감을 느꼈는지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교단 장으로부터 몇 차례 경고를 받기도 했었습니다. 크리스천은 악마와의 싸움을 포기할 수 없는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일의 선봉장으로 일하셨던 것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한다고 했다면 한평생 편하게 살진 모르나,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악을 덮느냐 들추느냐에 따라서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