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 요 7:14-36.
묵상자료 7235호(2021. 3. 8. 월요일).
시편 시 137:7-9.
찬송 9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단 한번,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행이나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친절과 능력을 바로 지금 베풀라. 미루거나 게을리 하지 말라. 다시 또 지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윌리엄 펜이 남긴 말입니다. 윌리엄 펜은 1644년에 태어나, 74년을 살다간 영국의 정치가입니다. 그가 살다간 74년의 프로필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국의 신대륙 개척자, 찰스 2세에게 북아메리카의 델러웨이 강 서안의 땅에 대한 지배권을 허가받자, 그 땅을 펜실베이니아라 이름 짓고 퀘이커 교도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신앙의 신천지를 만들었다. 총독과 양원제 의회 의한 정치를 실시하고, 그 스스로 총독이 돼 필라델피아를 건설 인디언들과도 우호적으로 지냈다. 다시 또 지나갈 수 없는 길을 윌리엄 펜은 이렇게 살다 갔습니다. 펜실베이니아란 펜의 숲이 있는 지방이라는 뜻이기도 하데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펜이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우정이었습니다. 이것은 인디언들과도 우호적으로 지냈다는 말에도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우정은 영혼의 결함이고 마음의 결혼이며 그리고 덕성의 기하학이다.” “나는 너와 나 사이에 우정을 고리로 서로 굳게 매여 있는 쇠사슬로 비교하고 싶지 않다. 고리는 녹이 슬고 쇠사슬은 넘어지는 나무에 끊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내는 동시에 친구일 수 있는 여자가 참된 여자이다. 친구가 될 수없는 여자는 아내로도 마땅하지 않다.”고도 했습니다. 펜이 남기고 간 이런 말에서 그가 우정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년 2월 7일 방송>
2. “초막절 명절에 올라 가신 예수(14-24절)”과 “이분이 그리스도인가?(25-31절)”, 그리고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리라(32-36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흔히들 구약을 예언 혹은 약속이라고 부르고, 신약을 성취 또는 응답으로 부릅니다. 그것은 넓게는 구원을 의미하고 구체적으로는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 대망은 가장 큰 삶의 의미이며 목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시련을 겪던 일제 강점기나 동란 중에 가장 많이 불렀던 고대가는 하늘의 구름 빛만 붉어져도 주님이 오시는가 했다는 가사가 있는데,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어디서 특별한 사람이 나타났다 하면 일단 그리스도인가?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에게 맡겨둔 재산을 찾아낼 기세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저자거리의 아무에게나 친구가 되어줄 수 없는 건 분명한데 말입니다. 성경이 예언한 그리스도는 구원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를 심판하실 분임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두려운 대상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궁금하게 하는 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 그리스도라 불리는 분에게 적대적 관계에 있었고, 일반 군중들에게는 말씀의 권위는 물론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해도 그를 능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뿐 아니라 군중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고,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로 올 것인지 암시적인데, 그들 군중들은 나사렛 출신인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 헷갈리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두둔하듯 예수자신도 군중들이 알고 있는 당신의 출신 배경을 인정해 주는 듯 말씀하고 있는 점도 혼란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런 당시의 군중들의 이해를 일순간에 뒤집어엎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 당신은 자신의 의지로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분의 의지로 왔으며, 군중들이 알지 못하는 그 분을 예수 자신은 알고 있고, 그분이 자신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군중들은 멘 붕이 왔을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도 아니고, 군중들 자신도 아닌 제3자인 그분이 등장하게 되자, 그들의 이성으로는 수용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인간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신앙의 영역으로 넘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인간이 항복하게 되는 영역으로 건너왔으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