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전은 교회의 공동체성의 표현. / 요 6:52-59.
묵상자료 7246호(2021. 3. 19. 금요일).
시편 시 139:22-24.
찬송 28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희망위에서 사는 것이어서, 희망이 사라질 경우 사랑도 사라진다. 즉 사랑은 연로가 바닥나면 사그라지는 불길과도 같은 것이다. 또한 사랑은 그 어느 누구도 용서치 않는 폭군이다.” 피에르 코르네오가 남긴 말입니다. 코르네오는 1606년에 태어나 78년을 살다간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입니다. 생전에 인정받았던 행운의 인물이었지요. 당시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그의 열렬한 숭배자였는데요. 발자크는 물론 몰리에르는 크르네오를 자신의 스승이며 가장 빼어난 극작가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몰리에르는 코르네오가 지루하고 또 평범한 운문을 많이 쓴다고 공경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변명을 해 주었습니다. “내 친구 코르네오는 세상에서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운문을 불러주는 친구 하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이따금 혼자 내버려 두는데, 그러면 코르네오의 글 솜씨는 형편없어진다.” 그런가하면 라신네는 코르네오가 자신보다 백배나 더 아름다운 운문을 썼다고 했습니다. 코르네오는 생전에 거의 40년 동안 놀랄 만큼 다양한 희곡을 썼는데, 그 맨 첫 시각이 넬리트라는 희곡이었습니다. 코르네오가 몸소 겪은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는데요. 사랑은 연료가 바닥나면 사그라지는 불길과도 같은 거라는 말을 남긴 코르네요. 그는 평생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을 지켰습니다. 35살에 마르드 랑빼르에와 결혼해서 7명의 자녀를 두었고, 자녀들에게도 헌신적인 아버지였습니다. 아내의 동생과 결혼한 남동생 부부와는 거의 한 가족처럼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년 2월 16일 방송>
2. “생명의 빵 3(52-59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는 듣기에 따라 섬뜩한 말씀도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53절, 54절, 55절, 56절에서 연거푸 같은 말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가 오랜 크리스천이라고 하더라도 이 말씀 때문에 갈등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만찬을 성별하는 때에 종이 울리고 그 순간에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화체설을 주장해서, 오해를 부추기기도 합니다. 주후 140년경에 나온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변증서 1>에는 주일에 1부 말씀의 예배가 끝난 후 세례 받은 사람들만 남아서, 교회당 문을 걸어 잠그고 성찬 예식을 거행하는데, 이를 엿듣게 된 사람들이 오늘 읽어드린 53-55절의 말씀을 듣고는 실제로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으로 오해를 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함께 교회가 지켜온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함께 세례와 성찬을 거행하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계승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말씀만 강조하는 일부 개신교회는 성례의 가치를 간과하고 있는 점에서 많은 반성이 필요합니다. 세례는 기독교회에 입회하는 의미만이 아니라, 죄에서 예수께로 완전히 돌아선다는 의미로, 모든 신앙생활을 첫 걸음이 되는 것이고, 성찬은 예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살아간다는 연합의 의미로 성례전(세례와 성만찬)을 교회 생활의 구체적 내용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처럼 비대면 예배가 계속될 경우에, 유튜브 등 영상으로 예배를 시청하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지만,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영국의 소설가 A. J.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에는 여러 해 동안 신부님이 없는 시골 교회의 안타까운 얘기가 나옵니다. 성례를 집행할 신부님이 없으니, 아무리 교리공부반(Catechism class)을 수료했다 하더라도 세례를 받을 수도 없고, 성찬에 참여할 수 없었던 슬픈 얘기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제가 출석하는 왕십리 루터교회는 유튜브 예배에 참석하기 전에 각 가정에 미리 배달된 성찬에서 사용할 떡과 잔을 준비해 두었다가, 목사님의 인도를 따라 성찬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예배의 공동체성을 생각할 때 좀 더 고려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칫 이런 편의주의가 예배의 엄숙함과 그 가치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례를 통해서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의미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천국의 열쇠>에 등장하는 교우들처럼 참된 예배를 갈망하는 경험도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