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 / 요 6:60-71.

박성완 2021. 3. 20. 00:00

묵상자료 7247(2021. 3. 20. 토요일).

시편 시 140:1-3.

찬송 4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진리를 찾아 세상을 헤맨다. 비석에서 두루마리 책에서 그리고 영혼의 맑은 꽃밭에서,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구한다. 탐구자가 돼 온 세상을 찾아다닌다. 그러나 아무 데서도 진리를 찾을 수 없을 때, 결국 어머니가 읽어 주시던, 그 책안에 진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존 그린리프 휘티어가 남긴 말입니다. 휘티어는 1807년에 태어나서 85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미국의 작가입니다. 하지만 언론인, 노예제 폐지론자, 퀘이커교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휘티어는 대부분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사람들은 훗날 전기에 관한 제목들을 이렇게 붙였습니다. 퀘이커의 전사, 자유의 음유시인, 인간의 친구, 휘티어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가난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휘티어에게도 인생에 낙심하는 시기가 있었는데요. 20대 중반 무렵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고향으로 귀향을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고향으로 돌아 온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문학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 사랑에 실패하고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유도 컸습니다. 그러나 휘티어는 이 시기를 아주 잘 극복하는데요. 자신의 좌절을 자만심 탓이었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이런 그가 가슴에 품고 살았던 말들입니다. “십자가란 옳게 지기만 하면 무거운 짐이 아니라, 당신을 받쳐주는 기름이다.” “오로지 책임을 다한 데에만 삶이 있고, 오로지 노력을 다한 끝에만 휴식이 있다.”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말 가운데 가장 슬픈 말은, ‘그렇게 될 수도 있었는데라는 말이다. 친절한 말 한마디, 동작, 혹은 눈물이 종종 상심한 마음을 치유했고, 종종 친구를 진실 되게 만들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218일 방송>

 

2. “믿지 않는 제자들(60-65)”베드로의 신앙고백(66-71)”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믿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한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는 제자들까지 소환해서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제자들이 믿음 없음을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전하고 있는데, 첫째는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에 거슬려서 믿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얘기는 제자들 자신의 얘기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이 반문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을 때 마음이 불편해지고 방어벽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송두리째 부정하는 그런 반응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반문을 통해서 사실은 제자들 마음에는 소극적인 문제, 어렵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문제, 아예 받아들이거나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방어막을 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마을에서 총무직을 맡았을 때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인간증명서를 받아서 시청에 제출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을 주민임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 분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거절을 한 것입니다. 대학을 나온 분이고 병원원장의 부인이었습니다. 인감을 떼야 하는 일은 흔해져서, 도용이나 악용을 막기 위해 사용처를 기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용도로는 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마음에 자기 방어벽을 만들어 둔 경우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 마음을 열 수가 없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고동락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 중에서 배신자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하셨던 다음 단계를 주목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데까지 끝까지 설득하신 것입니다. 저는 사람에 대해서 잘 포기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신뢰 관계를 깨트린 사람은 두 번 다시 관계 회복을 위해서 애를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기를 기도하고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제 삶이 복잡해서 다른 일에 힘쓰겠다는 심산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달랐습니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차이를 설명하시면서, 당신의 말씀은 영적인 것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다시 한 번 더 주님과의 관계는 사람이 자신의 노력이나 지혜로 맺고 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