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죽음을 은총으로 생각할 이유. / 요 12:27-36.

박성완 2021. 3. 31. 00:00

묵상자료 7258(2021. 3. 31. 수요일).

시편 시 142:6-7.

찬송 53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 가운데서 인용합니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 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 뿐.” 각종 언어에 통달한 언어의 천재, 기호학자이며 철학자, 역사학자이자 미학자인 움베르트 에코는, 다빈치 이후의 최고의 르네상스적인 인물로 통하고 있지요. 철학과 기호학 이론을 마음껏 발휘한 그의 첫 소설 [장미의 이름], 1980년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이 소설의 처음 제목은 [수도원의 범죄사건]이었지요. 하지만 장미 전쟁, 장미 십자회 등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역사적인 상징성이 있는 [장미의 이름]으로 제목을 바꿨습니다. 이 소설은 중세의 한 수도원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을 추리기법으로 다루고 있지요. 132711월 어느 날, 아드 손은 그의 사부인 윌리엄 수도사와 북부 이탈리아의 외딴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그 수도원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책들이 있는 곳인데요. 세계 전역의 수도사들이 유학을 와 있는 이곳에,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윌리엄 수도사는 그 사건을 하나하나 풀어갑니다. 살인 사건은 요한 계시록의 예언에 따라 진행되는데요. 두 번째로 죽어간 수도사는 그리스어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하는 번역가였는데, 첫 번째 죽어간 유모어에 능한 사본가 아델모와 형제 같은 사이었지요. 그리고 3번째 죽음, 4번째 죽음에 이어지는 죽음들도 모두 수도원의 장서 관에 숨겨진 비밀의 책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 2부 희극론 때문에 일어난 것임이 밝혀집니다. 웃음과 희극을 악마처럼 여긴 장서관의 지배자 호르에 수도사,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의 책장에 독을 발라놓은 것이 죽음의 원인이었지요. 모든 걸 알게 된 윌리엄의 추적으로 궁지에 몰린 호르에 수도사는 비밀 장서관의 책을 불태워 버리고 윌리엄은 이렇게 외칩니다. “서둘러라. 저 영감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다 먹어치우겠다.” 불길로 수많은 장서가 불타고 윌리엄은 사람보다 책을 구하기 위해 미친 듯이 책들을 불길 속에서 구해냅니다. 하지만 불길은 치솟아 장서 관을 모두 태우고 말았지요. 그 후 세월이 지나 그 수도원을 방문한 아드 손은 이렇게 독백합니다. “바빌론의 영화는 어디로 갔는가?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그 덧없는 이름 뿐.”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독단.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남의 것은 헤쳐도 좋다는 이기심. 변화가 두려워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그 조바심, 그렇게 움켜쥔 채 놓지 않고 집착하는 이름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언젠가는 지고 마는 장미일지 모르는데. 가시가 앙상한 그 장미를 꼭 쥔 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327일 방송>

 

2. “죽음을 예고하신 예수(27-36)”을 읽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나이가 들면 죽음에 관한 얘기를 자주 하게 됩니다. 그만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많이 다릅니다. 아직 서른 살 초반의 나이로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이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런저런 얘기들 가운데, 자신을 죽이려는 세력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셨겠지만, 자신의 죽음을 남의 일처럼 얘기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처음부터 죽음을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생각하며 사신 분이셨습니다. 당신의 이름인 예수가 이를 대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란 의미는 죄를 대속하는 희생양을 상징하는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주님과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건강하다는 전제하에 어쨌든 오래 살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을 긍정적으로 이해하신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야말로 천국에 이르는 첫 걸음인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당한 방법이라면 죽기를 힘써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시간을 조금 더 달라는 기도를 올리십니다. 제대로 된 고난의 시간이며 죽음의 시간을 맞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이 전설처럼 기억하고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이 높이 들리게 될 때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찾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인용한 구절 요 3:14-15을 떠올리게 하셨는데, 모세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려고 놋 뱀을 긴 장대위에 달아 바라보고 살게 했던 그림자의 실체로 주님의 십자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죽음을 천국에 이르는 첫 걸음으로 긍정적으로 이해해야 할 이유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이며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