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 요 14:15-31.
묵상자료 7264호(2021. 4. 6. 화요일).
시편 시 144:3-5.
찬송 46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실리야 악슈노프의 [달로 가는 도중에] 가운데서 인용합니다. “저녁 내내 그리고 밤새도록 그녀 생각을 하게 되리라. 다음 날 아침엔 그녀를 생각하면서 잠에서 깨어나리라.” 1960년대 러시아 문학의 새로운 기수였던 바실리야 악슈노프는 젊은이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보수적인 비평가로부터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작가는 도덕과 교훈 따위의 전염병을 피해야 한다. 이런 좌우명을 가진 그가 1962년에 발표한 소설, [달로 가는 도중에]. 한 벌목꾼의 짝 사랑을 담고 있는 작품이지요. 시베리아 오지의 벌목꾼 키르킨첸코는, 때로는 비정하게 때로는 악착같이 모은 급료로 여행을 떠나갑니다. 그가 탄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릴 때, 스튜어디스가 묻습니다. “외투 좀 치워도 될까요?” 미소 짓는 스튜어디스 타냐를 보고 키르킨첸고는 첫 눈에 반해버리지요. 섬세한 손가락, 멋진 미소, 매혹적인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여자가 눈앞에 나타나다니. 이렇게 그녀를 단숨에 사랑해 버린 그는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백화점으로 바로 가서 양복 세 벌을 삽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줄 스카프와 향수, 옷과 선물을 사들이지요. 어둠 속에서 여자의 손가락이 당신의 목을 어루만지면, 달의 손가락이 당신을 어루만진다는 착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렇게 잠이 들 때면 타냐가 옆에 있다는 상상을 합니다. 다음 날 그는 타냐를 보기 위해 공항 주변을 배회하지요.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고 애가 탄 그는 하바로프스크행 항공편을 탑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녀가 없었지요. 이번에는 다른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를 그는 그녀를 보기위해서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얼마 남지 않는 휴가와 급료를 다 써버리지요. 그 후 벌목장이 있는 사할린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는 공항에서 타냐를 만납니다. 멀리서 보이는 타냐는 웃고 있었지요. 빈털터리 신세로 차마 그녀 앞에 다가설 수 없는 키르킨첸코는 동료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달까지 가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나?” 동료는 대답하지요. “대략 30만 킬로미터쯤은 될 거야.” 키르킨첸코는 생각합니다. 일하는 동안에도 쉬는 동안에도, 잠자는 동안에도, 아침에도 그녀 생각으로 깨어나게 될 것이라고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년 4월 2일 방송>
2. “성령의 약속(15-26절)”과 “예수의 평화(27-31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엊그제 저는 용문행 전철을 타고, <은행나무 식당>에서 제공한 셔틀을 이용해서 용문사를 다녀왔습니다. 20여 년 전 저의 선생님과 함께 용문산 관광단지 내의 한 여관에서 일주일을 머물며, 신학교재를 집필하러 갔을 때 받았던 절간 앞 500년도 더 넘은 은행나무에 대한 좋은 인상으로, 매년 두 세 차례는 방문하곤 합니다. 금년에는 은행나무 주변에 세 겹 네 겹으로 걸린 소원을 적은 플라스틱 은행잎을 들춰보았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취집 대학합격 결혼 건강 등을 비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숲속 길을 따라 냇가에 쌓아둔 수 백 수천의 돌탑들을 엮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런 소원들은 기도할 주제가 아니라, 자신들이 힘써야 할 과제로 생각해야 맞을 것입니다. 힘들게 이곳까지 와서 시간과 열정을 쏟을 일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이 시대에 제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저의 삶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정해야 옳을까요? 혹시 자신이 할 일을 다 맡기는 대신, 무슨 일을 해야 하는데 힘과 용기를 주시라고 기도할 수는 없겠습니까?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 가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걱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선 성경에서 사용하는 평화라는 단어는 에이레네(ειρηνη)인데, 번역 성경에서는 평안이라는 말로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화와 평안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말인데, 그 의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때 누리는 영적 상태”(롬 5:1, 골 1:20, 빌 4:6,7)를 뜻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평화란 좁은 의미로는 전쟁이 없는 상태이며, 넓은 의미로는 서로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으나, 영원히 기대할 수 없는 꿈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평화를 우리들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이 평화를 이미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주셨다는 평화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든 인간이 서로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는 그런 상태는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조화로운 세상보다는 분쟁과 다툼을 가져다주신 것인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는 평화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짐으로 누리는 영적 상태임에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때만 누릴 수 있는 평화였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