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을 다시 생각함. / 골 2:6-23.

박성완 2021. 4. 29. 00:00

묵상자료 7287(2021. 4. 29. 목요일).

시편 시 148:4-6.

찬송 38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가운데서 인용합니다. “무언가 너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내게 남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단 말이야. 나는 늙어버린 나무 밑동이일 뿐이야. 미안해.” 1964년에 출판된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가장 감명 깊었던 책으로 꼽히고 있지요. 20년 넘게 전 세계에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 준 책인데요. 동화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어른이 읽어도 좋은, 시대를 초월한 명작입니다.

옛날에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있었지요. 매일같이 소년은 그 나무에 와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주워 모았습니다. 그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 숲속의 왕자 노릇을 했지요. 소년은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서는 나무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사과도 따 먹고 숨바꼭질도 했습니다. 그러다 피곤해 지면 소년은 나무 그늘에서 단 잠을 잤지요. 소년은 나무를 무척 사랑하고, 나무도 행복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소년도 점점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많아졌지요. 어느 날 소년이 나무를 찾아갔을 때, 나무가 내 줄기를 타고 그네도 뛰고 사과도 따 먹으며 놀아라고 말을 했지요. 하지만 나무와 노는 것이 재미없어진 소년이 말합니다. 물건이 살 돈이 필요하다고, 나무는 사과를 따다가 도회지에서 팔라고 권하지요. 소년은 나무에 올라가 사과를 따고는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지요.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년이 돌아와 말하지요. 내겐 나를 따뜻하게 해 줄 집이 필요해. 나무가 말합니다. “이 숲이 네 집이야. 내 가지들을 베어다가 집을 짓지 그래.” 소년은 나무 가지들을 베어 집을 지으러 갔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그가 돌아오자 나무는 기뻐서 같이 놀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소년이 말했지요. “나를 먼 곳으로 데려갈 배 한척이 있었으면 좋겠어.” 나무는 내 줄기를 베어서 배를 만들어라.” 얘기합니다. 소년은 나무의 줄기를 베어 내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떠났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그 소년이 다시 돌아왔지요. 나무는 말합니다. “미안하다. 이젠 너에게 줄 게 아무 것도 없구나. 나는 다만 늙어버린 나무 밑둥일 뿐이야. 미안해.” 그러자 소년이 말합니다. “앉아서 쉴 조용한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난 몹시 피곤하거든.” 그러자 나무는 안간힘을 다해 굽은 몸뚱이를 펴면서 말했지요. “앉아서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야. 이리 와서 앉으렴, 앉아서 쉬도록 해.” 소년을 그 나무 밑에 앉아 지친 몸을 쉬었고,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주고 주고 또 주면서도 더 줄게 없어 미안해하는 나무. 그 나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잇지요. 오랜 시간 희생으로 세월의 매듭을 지어가는 부모님. 받은 것의 이자는 커녕 원금조차 갚을 길이 없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부모님, 허공의 이름이 되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자주 불러보고 싶은 이름이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427일 방송>

 

2. “세속의 유치한 원리에 대한 경계(6-19)”그리스도를 통한 새 생활(20-2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초대교회를 흔들었던 두 세력이 있었는데 하나는 유대교로부터 온 율법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세계로부터 온 이성주의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란 사람이 해야 하고 해선 안 될 일을 규정하는 도덕적 규범에 강조를 두는 일체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와는 별개로 세속 세계는 철학에 기반을 둔 이성주의가 사람들의 정신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철학이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온갖 문제들을 이성의 힘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허황한 가설들을 제시하고는 갑론을박하면서 시간을 탕진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수천 년간 이런 가설을 쫓아 많은 발전을 한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의 문제들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서 크리스천들은 이런 세상에 속한 원리들을 버리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논리들은 생명에 관한 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위험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배우고 있습니다. 60년대에 나온 고켈이 쓴 <십자가와 인간>에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의 일화가 소개되는데, 신학자를 포함 인문학자들은 원자탄과 같은 무기개발이 세계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 경고하는 것에 반해서, 위원회는 통제되는 원자폭탄과는 달리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인간성이 훨씬 더 위험하다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 밖의 폭탄이 아니라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미움과 분노와 같은 타락한 인간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에 대해서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장된 겸손과 부질없는 금욕주의 등으로 하나님을 속일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운명을 통제하는 주인이 아니라,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맡겨야 할 분명한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