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30. 삼위일체 주일]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사 6:1-8.
묵상자료 7318호.
시편 시 7:8-10.
찬송 24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묘한 감정이 마음을 어지럽힐 때 “아지랑이처럼” 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그러한 느낌, 희미하게 보이지만 먼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처럼 영원히 닿지 않을 것 같은 존재감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요. 아지랑이가 투명한 불꽃처럼 지면위로 피어오르는 정경은 언제 보아도 어스름하고 신비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5월 16일 방송>
2. 오늘은 성 삼위일체 주일로 구약 이사야 6:1-8을 본문으로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이사야는 남왕국 유다의 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의 네 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활동한 예언자로,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바벨론의 거센 침략을 눈앞에 둔 풍전등화의 시대배경에서 오늘 본문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 환상을(1-13절) 통해서 이사야를 소명하셨습니다(1-3, 9-13절).
누에가 실을 뽑듯, 유려한 시어(詩語)를 골라내고 감동적인 소설을 끌어내는 이들은, 고통과 연민의 밤이 준 선물이라고 말한다 합니다. 이사야란 대 예언자 역시 그를 키워낸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우들 중에도 유독 환상이나 환청을 경험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그들은 남다른 힘든 인생역정을 살아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희망의 방향으로, 또 다른 어떤 이는 절망의 방향으로 문제를 짊어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성소를 덮고 있는 야훼 하나님의 옷자락을 보았고,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입니다. 이런 성소의 환상을 보는 이사야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캄캄한 절망 속을 살고 있는 자신에게 새 희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한 이사야는 죽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4-5절).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 배우고 신앙하였습니다. 이사야 역시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성소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 이사야는 죽게 될 것을 직감하고, 절망적인 탄식을 합니다.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 야훼 하나님을 뵙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엄청난 위험을 경험하게 한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총 아래 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과 명예는 목숨을 걸고 얻으려고 힘쓰지만, 맑은 물과 공기 그리고 기름진 흙의 소중함과 가치를 무시하며 살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죽음을 눈뜨게 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와 함께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6-8절).
죄의 가공할 위력은 누구도 죄를 가지고서는 사람답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죄를 보았습니다. 그는 절망했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호위하며 찬양하는 스랍을 불러 제단의 뜨거운 돌을 집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더러운 입술을 지졌습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할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물으셨을 때, 그는 “여기 제가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동의를 받으신 후에 그를 위대한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나 결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부르시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만이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