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계시를 받을 수 없는 시대에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 삼상 16:1-13.
묵상자료 7370호(2021. 7. 21. 수요일).
시편 시 18:46-48.
찬송 23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골에 갔을 때, 그곳이 도시가 아닌 시골임을 실감시켜주는 것으로, 돌담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통 돌담의 유래에 관한 설명을 보면, 돌담에도 종류가 있었지요. 가령 그냥 막돌이나 잡석으로 쌓은 강담이 있는가하면, 같은 크기의 돌을 줄을 맞춰서 쌓은 사고석담도 있고요, 돌의 면을 다듬어서 일정하게 쌓은 다듬 돌담도 있었습니다. 쌓는 법도 두 가지였습니다. 막돌을 그냥 막쌓아 올리는 막돌 허튼층 쌓기법, 다듬은 돌을 차근차근 쌓은 다듬은 돌 바른 층 쌓기법. 이름이 참 재미있는데, 막돌 허튼층쌓기는 주로 일반 농가에, 다듬은 돌 바른 층 쌓기는 주로 궁궐이나 양반집들에 많이 쓰였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담의 높이에도 차이가 있었지요. 시골의 대갓집들에서는 돌담의 높이로 바깥 길로 누군가가 물동이를 지고이고 지나갈 때, 또아리 이상은 보이되 그 이하는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했습니다. 머리에 얹는 또아리 이하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바깥에서 집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러니 집안사람과 바깥을 지나가는 행인의 시선이 마주칠 일이 없는 높이를 뜻하지요. 그야말로 사생활이 보호되는 높이였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 백성들은 훨씬 낮게 지었지요. 돌담 바깥을 지나는 사람이 집안의 마루며 그 밑에 댓돌위의 놓인 신발까지 훤히 볼 수 있을 높이였습니다. 신발만 보고도 집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을 높이였었지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유대감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담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시골에 가서 무릎보다 조금 높은 돌담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훈훈해지는 거겠지요. 더군다나 그 낮은 돌담들 밑으로는 대개 그 돌담들만큼이나 작고 소박한 채송화나 분꽃이 피어있을 때도 많습니다. 가르고 나누는 담이지만 전혀 위협적이 않던 돌담들. 때로는 휴가 때 꼭 만나고 싶은 풍경이기도 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7월 30일 방송>a.
2. “다윗에게 기름을 붓다(1-13절)”을 읽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름부음이 세 가지 용도로 나오는데, 첫째는 일상용으로 목욕 후, 존경의 표시, 장례 시에 기름을 붓고, 둘째는 성결예식용으로 선지자나 제사장 그리고 왕을 기름 부어 성별시키고, 셋째는 의료용으로 병사자 부상자에게 바르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당연히 성결 예식용으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을 삼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구약 성경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전달받는 선지자나 제사장 혹은 왕과 일반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를 빙자하는 거짓 선지자나 제사장들이 있었던 것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짓된 것은 오래 가지 않아 들통이 났고, 엄한 죄과를 치러야 했습니다.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현존인 성경 말씀이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울이라는 왕이 실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파면하고 새로운 왕을 임명하려는 매우 위험한 시대 정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를 염려하는 사무엘 제사장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베들레헴으로 떠날 사무엘에게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제사를 지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제사에 이새를 초청합니다. 그리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목욕재계시킨 뒤, 하나님께서 임명하실 새 왕을 찾아봅니다. 이새는 여덟 아들 중 엘리압이나 아비나답 그리고 삼마를 보여드리고 일곱째까지 보여드렸지만 그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뽑으실 인물이 없다 했습니다. 막내아들 다윗은 양을 치는 중이어서 참석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을 데려오기 전에는 식탁에 앉지 않겠다고 합니다. 마침내 다윗이 불려왔을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셨고, 그에게 기름을 붓자 하나님의 영이 다윗에게 머물러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맥락적으로 혹은 종합적으로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매우 구체적이고 매우 작은 범위에서만 살고 있는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기대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앞서의 언급처럼 매우 추상적이고 속이 뻔히 보이는 결론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날 때만이 아니라, 하루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삶의 매 순간마다 날마다 주시는 만나인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큰 뜻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실제의 삶에서는 힘들고 난처한 일을 만날 때만 우리는 기도하게 되고,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묻곤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짙은 안개 속을 걸어가는 우리네 삶이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과 하나님의 이름을 조용히 부르는 순간에, 우리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 평안과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거대한 하나님의 힘에 붙들린 안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