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무당을 찾을 것인가? 하나님을 찾을 것인가? / 삼상 28:3-20.

박성완 2021. 8. 5. 00:00

묵상자료 7385(2021. 8. 5. 목요일).

시편 시 22:1-2.

찬송 41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친구는 그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느라,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고 합니다. 회사에서 야근을 하는 날도, 집 근처 사설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더 했지요. 처음으로 시험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게 즐거웠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공부고 시험이니, 진작 이렇게 공부할걸. 아쉬움도 없었습니다. 그냥 지금 이 시험 통과가 아니면 안 된다 하는 생각뿐이었다고 합니다. 얘기를 듣는 내내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 했습니다. 늘 그래왔듯 그 친구의 인생은 앞으로도 내내 시시하고, 그저 그럴 줄 알았습니다. 영원히 나보다 못한 처지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회사에서의 스카우트라니. 그것도 파격적인 대우로. 그건 내가 바라던 것이었는데, 자신에게는 오히려 앞으로도 그런 일은 별로 없을 듯합니다. 복권에 당첨되지 않는 한, 자신도 친구도 큰 변화나 역정 같은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달음에 나를 추월 해 버린 친구. 하긴 한달음은 아니지요. 실은 그게 더 충격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그렇게 심기일전 노력할 수 있는 친구였다니. 마음에 어떤 꿈을 품고 그 꿈을 위해, 남몰래 독학에 노력할 줄 알았다니,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한 이 느낌이, 스스로에게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너무나 귀한 자극이 될 듯도 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312814일 방송>b.

 

2. “사울이 엔도르에 있는 무당을 찾아가다(3-20)”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은 애타는 제 마음을 알고 계실까요?” 가끔 받았던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요즘 너무 바쁘셔서 세상의 큰일에만 관심을 가지시고, 자신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으신 모양이라는 투로 질문을 합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목회자로써 난처한 경우입니다. 교인이 많든 적든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관심을 갖고 기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때문입니다. 그런 때 냉담하게 들릴 수도 있는 대답을 하곤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기도보다는 자기 자신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십니다.” 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울 왕이 무당을 찾아갔었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며 선지자인 사무엘이 죽어 그의 고향 라마에 묻힌 후,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치려고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마침 다윗은 사울을 피해 블레셋 땅으로 가서 은신하고 있었는데, 블레셋 왕 아기스는 정적을 피해 온 다윗을 자신의 호위대장으로 삼았습니다. 불레셋 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수넴에 진을 치자 사울은 이미 겁에 질려버렸습니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께 어찌하면 좋을까를 물었지만,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예언자로도 대답해 주지 않자, 자신이 몰아냈던 박수와 무당을 찾은 것입니다. 사울은 변장을 하고 두 신하와 함께 혼백을 불러내는 무당과 박수의 점집을 찾았을 때, 왕명으로 박수와 무당을 근절한 것을 모르느냐며, 누구를 날벼락 맞게 하려느냐고 거절하자, 사울은 야훼 앞에서 맹세하며 화가 미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무엘을 불러냈는데, 그때 무당이 사울인 것을 알아보고 놀랍니다. 무당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보인다며, 사울과 사무엘을 대면시킵니다.

   사울은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어떻게 하면 불레셋의 침공을 대처할 것인지를 알고 싶다합니다. 무당에게 불려나온 사무엘은 야훼 하나님은 이미 너를 떠났고, 너 뿐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까지도 불레셋의 손에 붙이실 것이라는 말을 듣자 사울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기절했던 것입니다. 겁에 질린 무당은 사울 왕에게 먹을 것을 장만해서 드리고 기운을 차리라고 합니다.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왕은 무당과 신하들의 권유로 음식을 든 후 그곳을 떠났다는 내용입니다. 갑자기 김소월의 시 <초혼/혼을 불러냄>이 생각납니다. 다섯 연으로 된 시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로 시작하는데 마지막 두 연은 이렇습니다.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제가 서울로 목회지를 옮겼을 때, 한 여자 집사님은 새벽기도회 나와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모세를 부르며 기도하곤 했습니다. 무당으로 살던 버릇이 그때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신통(神通)하면 성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초혼이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만 불러야 합니다. 비록 무당처럼 원하는 즉답은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오늘도 저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당신 뜻대로 살게 하소서!” 라고.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