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절반만 맞는 것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 막 12:35-44.

박성완 2021. 9. 3. 00:00

묵상자료 7414(2021. 9. 3. 금요일).

시편 시 27:13-14.

찬송 8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한 마디입니다. “나의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나는 그대가 위대한 사람들의 소음으로 귀가 멀고, 보잘것없는 소인배들의 침에 의해 온 몸을 찔리고 있는 것을 본다.” 한마디에 물들어 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젊은 시절 그의 철학과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모두 세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의 상처를 겪게 한 여성 루 살로메를 제외한 그 세 명의 남자 중 첫 번째는 쇼펜하우어였습니다. 니체는 리이프지히 대학에서 재학하던 중 스무 살 무렵, 자신의 공부와 인생에 대해 크게 방황하고 있었지요. 그의 기록에 의하면 단 하나의 즐거운 기억도 희망도 없이, 고통스럽고 실망스러운 일들만 겪으면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헌 책방에 갔다가 쇼펜하우어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의 책에서 세계와 인생 그리고 나 자신의 본성이 소름끼치도록 웅장하게 비치는 하나의 거울을 보는 듯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쇼펜하우어 다음으로 니체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던 두 번째 인물은 사회학자 랑케였고, 세 번째 인물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바로 바그너였습니다. 1868년 바그너의 <출산과 이졸대> 음악을 들은 뒤부터 니체는 바그너의 열렬한 펜이 됩니다. 그런 관계에 대해 누군가는 아버지를 일찍 잃은 니체가 바그너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았을 거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그너 역시 쇼펜하우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요. 그 점을 생각하면 쇼펜하우어에게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던 니체가, 바그너에게 그토록 크게 기운 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592일 방송>a.

 

2.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35-37)”,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38-40)” 그리고 과부의 헌금(41-4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번째 단락입니다. 둘째나 셋째는 비교적 많이 언급되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첫째 단락은 이해하기도 해석하기도 부담이 되는 내용인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하신 말씀이라고 언급하는 점을 고려할 때, 주변에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 중에는 율법학자들도 제법 참석했다고 봐야 할 것이고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초점은 이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오실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 자신이 했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110:1)을 그 증거 자료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굴복시킬 때까지 다윗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오른 편에 앉아 있을 것을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수가 없지 않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자손으로 올 것을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호위무사처럼 곁을 지킬 것을 명받은 존재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게 아니라는 주님의 말씀은 많은 논란을 몰고 올 수 밖에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는 이새 혹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말씀과 암시가 있기 때문입니다(11:1-10, 23:5, 5:2). 그래서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영 나온 사람들은 주님을 향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호칭을 사용했던 것입니다(11:9-10, 21:9). 이 지점에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구체적인 예언들과 암시들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모든 말과 글은 맥락적 이해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좁게는 문단 안에서의 맥락을 살펴야 하고, 넓게는 그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핀다면, 이새의 뿌리에서 나올 새싹이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 개념은 이른바 메시아의 육신적 계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인성(人性)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신성(神性)까지 겸한 존재임을 고려할 때는 다윗의 후손 이해는 반만 맞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소시민들이 주님을 맞을 때 사용했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는 인성을 가지신 주님을 말하고 있는 것일 뿐 신성을 가지신 주님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율법학자가 내민 질문을 반박하시며, “다윗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하셨는데, 그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일 수가 있느냐?”고 말씀하신 것은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가지신 주님을 언급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만 맞는 말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