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화(體化)된 신앙이 되기 전에는. / 막 14:43-52.
묵상자료 7422호(2021. 9. 11. 토요일).
시편 시 30:1-3.
찬송 43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복구도 회복도 안 됐습니다. 결국 과일 가게도 카페도 다 접어야 했습니다. 큰 빚만 남은 채였습니다. 그 때부터 두 사람 모두 과일이라면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과일 그림이든 달력을 벽에서 뗐고, 과일가게를 보면 먼발치에서 벌써 고개를 돌렸습니다. 다른 집에 갔다가 과일이 나오면, 둘 다 알레르기가 핑계를 댔습니다. 무려 3년이나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좋은 일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신랑은 1년쯤을 힘들어하다 다시 취직을 했습니다. 이제는 누군가가 주는 월급을 받는 걸 너무나 다행스러워합니다. 무엇보다 이제 다시 과일을 먹어야 합니다. 아내가 아이를 갖고 입덧을 시작한 겁니다. 아이가 벌써 두 사람의 상처를 다독여 주려는 걸까요? 그토록 외면하던 과일만 자꾸만 먹자고 합니다. 그래도 선뜻 먹지 못했는데 어느 날입니다. 모처럼 함께 시내에 나갔다가 발견했습니다. 거리에서 파는 주스가 온통 생 레몬주스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생 레몬을 잔뜩 쌓아두고 즉석에서 주스를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표정이 정말 먹고 싶었던 것을 발견한 표정이었습니다. 이 레몬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해 낸 이는 누구였을까? 남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스쳤습니다. 하지만 3년여 만에 처음으로 부부가 함께 과일을 다시 먹기 시작한, 깊은 상처를 회복한 그런 위대한 첫날이었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8월 24일 방송>b.
2. “잡히신 예수(43-50절)”과 “도망한 젊은이(51-52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이 구절은 첫째 단락에 비해서 중요성이 떨어진 때문에 소홀히 취급받아왔거나, 한 두 줄로 해석하는 경향이었습니다. 우선 오늘의 본문은 공관복음서에서 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서에서도 취급하지 않는 유일한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신약성경에서 요한 마가를 일컫는 구절이 10번 나오는데, 사도행전에서는 요한이란 이름으로 2번, 마가라는 이름으로 한번, “마가라 하는 요한”으로 세 번 언급되고 있고, 서신에서는 항상(4번 모두) 마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유대식 이름이고, 마가는 로마식 이름으로, 요한이든 마가든 동일한 사람을 일컫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바울 사도와 1차 전도여행에 동행했던 바나바의 생질로, 그의 갑작스러운 전도여행 포기로 바울이 마음이 상해서 2차 전도여행에서는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바나바), 데리고 가지 않느냐(바울)로 의견이 대립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는 동기를 만든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이 잡혀 가실 때 줄행랑을 친 사람들 중에 특히 입고 있던 삼베 옷, 혹은 홑이불을 벗어던질 절도로 급박했던 상황을 전한 것을 두고, 바로 그 인물이 마가 자신이었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유지돼 왔었는데, 최후의 만찬 날짜를 부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점을 들어, 당사자인 자신이 아니라 문서에 따르고 있음을 주장하는 이론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습니다(랄프 P. 마틴, 신약의 초석, p.258).
우리의 관심은 도망간 젊은이가 자신이 두르고 있던 옷을 전부 다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달아났다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첫째는 주님을 잡으러 왔던 군인들의 거친 행동에 겁을 먹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칼과 창 같은 무기를 들고 겁박을 주었을 텐데, 아마도 제자들의 사기는 죽어버렸고, 당찬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의 저자 김진홍 목사와 함께 D-Min.을 공부한 일이 있었는데, 그 분의 옥중체험담을 들었는데, 현대 신앙인들의 비굴함을 여실히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중정사람들에게 심문을 받을 때, 개신교 목사를 상대하는데 1년 예산이 500만원이지만, 로마 가톨릭 신부를 위한 예산은 10배가 넘는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쉽게 항복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둘째로 제자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도망간 까닭은 신앙의 깊이가 너무 얕다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성리 한얼산 기도원장 이천석목사님이 인도하는 부산 양산 감림산 부흥회에 참석하였는데, 여러 가지 부끄러운 모습들 중에, 그 기도원이 증축을 해야 하는데 목표한 헌금이 모이지 않아서 그걸 모으는데, 모두 눈을 감게 하고 강사가 액수를 부르는 것입니다. 천만원을 몇 번이나 불러도 응답이 없자. 이번에는 5백만원을 부릅니다. 그래도 없으니까 백만원을 부릅니다. 몇 사람이 손을 들었던 모양인데, “신학생들 빨리 가서 손 내리기 전에 이름과 주소를 적으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식으로 교회나 기도원을 신축하고 증축했다 하면 얼마나 얕고 천박한 신앙이겠습니까? 깊이 없는 신앙은 쉽게 말라버려서 그 존재감을 상실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맹신적인 신앙에서 사려깊은 신앙으로 성장해 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무조건 아멘하는 식이 아니라, 그 말씀 속에 있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체화(體化)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