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과 내생은 연속선이 아니라 불연속선이라는 진리. / 고전 7:25-31.
묵상자료 7452호(2021. 10. 11. 월요일).
시편 시 34:18-20.
찬송 23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장 그르니에의 [까뮈를 추억함] 가운데서 인용합니다. “창문을 닫아요. 날씨가 너무 좋습니다. 이건 플로베르의 친구인 르 프아트랭이 죽는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은 알베르 까뮈가 그의 수첩에서 인용했다. 그러나 까뮈는 그 반대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창문을 열어요. 날씨가 아주 좋아요.’”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까뮈는 그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가 쓴 서문에 이렇게 썼지요. “거리에서 이 작은 책을 펼치고 나서 겨우 처음 몇 줄을 일어보고 다시 덮고는 가슴에 꼭 끌어안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신없이 읽기위해 내 방에까지 달려왔던 그 날 저녁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 이 책을 열어보는 저 알지 못하는 젊은 사람을, 너무나도 열렬히 부러워한다.” 그렇게 스승이 쓴 책을 안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읽기위해, 설레는 기쁨으로 책을 안고 달려가던 까뮈. 바로 그 책 서문을 쓴 장 그르니에가 제자인 까뮈를 추억하며 쓴 책이 있지요. [까뮈를 추억함] 이 책은 까뮈와 장 그르니에 그 스승과 제자의 첫 만남부터 시작됩니다. 장 그르니에가 알제이 고등학교의 선생으로 부임했을 때, 그의 철학과목 학생 중에 17살의 까뮈가 있었지요. 장 그르니에는 수업시간에 까뮈를 지목하면서, 맨 앞자리에 앉으라고 말합니다. 그를 잘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첫 만남부터, 스승은 사람을 알아본 것인데요. 그런데 그 후 오랫동안 그가 보이지 않았고, 그르니에는 학생 한 명을 데리고 까뮈의 집을 찾아갑니다. 그의 집은 초라했고, 까뮈는 아파서 누워있었지요. 스승이 제자에게 “건강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르니에는 이런 인상을 받았지요. “나는 그에게 귀찮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말 한마디 한 마디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로부터 10년 뒤, 그 때의 느낌을 까뮈는 스승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그 때 당신은 사회라는 것을 대표했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왔던 그 날, 나는 당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불쌍한 것은 아니라고 느꼈어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년 8월 6일 방송> a.
2. “종말을 목전에 둔 미혼 남녀들(25-31절)”을 읽었습니다. 세상 끝날 곧 종말에 대해서는 성경 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 개인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종말이고, 온 우주가 파국을 맞는 것도 종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적어도 세 가지 종류의 종말관이 있습니다. 곧 종말이 온다는 이른바 임박한 종말관, 이미 내 안에 종말을 맞고 있다는 실현된 종말론, 그리고 온 우주가 파국을 당하게 될 미래적 종말관이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개개인이 마지하게 될 종말 곧 임박한 종말관을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임박한 종말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요즘 저 보다 5살 연상이신 평신도 한 분을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이곳 아산의 초대 그리고 2대 민선시장을 역임하신 분인데,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약사 출신이신데, 요즘에는 성경에 심취해서 성경대로 육식보다는 채식을 강조하며 특히 약을 먹지 않고 자연에서 건강에 필요한 모든 것을 섭취할 것을 강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선지 요즘은 혈기가 수그러들고 많이 부드러워지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창 1:29절입니다.
한 개인의 죽음을 인류의 파멸과 저울질 한다면 한 푼도 가볍지 않다고 합니다. 내가 없는 세상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한 개인의 죽음은 곧 바로 주님 앞 심판장으로 안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죽은 사람에게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이런 개인의 죽음을 생각할 때 미혼인 남녀들에게는 진지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미혼 남녀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종말 앞에서 진지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무튼 종말 앞에서 미혼 남녀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는 초점을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아내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중략>” 무슨 말씀입니까? 아내나, 슬픔이나 물건이나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사라져 버릴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허망한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종말이라는 사건은 우리의 모든 관계를 계속 유지하거나 연속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혼법(嫂婚法)을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유대인들에게(사실은 한국 개신교도들도 마찬가지), 예수님은 천국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며, 땅에서의 관계가 천국에서는 연속성을 갖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마 22:23-33). 그러니까 이 생과 내 생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전혀 다른 세계임을 각오하고, 이 세상의 모든 인연과 역사를 끌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