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하나님과 우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신앙에서. / 고전 8:1-13.

박성완 2021. 10. 13. 00:00

묵상자료 7454(2021. 10. 13. 수요일).

시편 시 35:1-3.

찬송 35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황지우 시인의 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가운데서 인용합니다. “그럼으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 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 주면서, 먼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1983년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로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황지우 시인은, 1998년 제 5시집인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에서, “너무 아파만 하지말자, 살아야 하지 않겠냐?” 는 쓸쓸한 인사를 건네고 있습니다. 그 중에 <뼈아픈 후회>라는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쓰지요.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니었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럼으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에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912일 방송> a.

 

2. “우상앞에 놓인 제물(1-13)”을 읽었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나라에서는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요한 전통으로 삼고 있습니다. 민주공화제의 헌법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이런 관혼상제는 그에 버금가는 법도가 되고도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통은 고대 세계에서 각 나라마다 독특한 규정을 갖고 있었고, 신앙에 버금갈 정도로 굳어 있어서, 이방인들이 이에 적응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고린도서나 에베소 같은 곳에서는 신앙에 준할 정도로 엄격하게 지켜서 웬만한 신앙을 갖고 있지 않으면 동화되기 십상이었습니다. 가령 오늘 본문에는 우상 앞에 놓인 제물에 대한 문제가 고린도 교회 안에서 심각한 수준으로 발전한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아직도 우리나라 개신교회 안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당시에는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을 식용으로 하는 가정은 부잣집 외에는 힘든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상에 올리는 돼지나 소 머리도, 여러 번 사용한 것들을 올려야 했습니다. 그래야 싼 값으로 빌려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 제사상에 올려졌던 소와 돼지 머리가 사람들의 밥상위에 음식으로 차려져야 했습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상 앞 제사상에 오려진 음식이기에 그것을 먹는 것은 우상숭배와 진배없다는 해석을 한 것입니다. 안동에 가면 지금도 헛제사밥이라는 메뉴가 식당에서 팔고 있습니다. 제사 때 올려진 음식을 비벼서 먹는 것을 말하는데, 실제로는 제사상에 올려진 것이 아니라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을 만들어서 파는 것입니다. 먹을 만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옆집에서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에는 그 음식을 이웃들과 나눠 먹었습니다. 물론 저의 부모님은 자신들의 신앙이 독실한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절대로 제사 음식을 받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제사 음식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우상과 무관한 것들을 찾기 어렵습니다. 자동차나 전동차 그리고 각종 옷감들을 만들 때 고사(告祀)라는 것을 지냅니다. 야구장을 개장할 때도 만선(滿船)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신령께 비는 제사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상의 도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성경 해석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신학 용어 중에 아디아포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 중립적임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건들은 선과 악, 하나님과 마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인 것들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서 비로소 선과 악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음식이라고 해서 우리가 어리석은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알고 감사하게 먹고 입고 살아가면 된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앞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는 일들로 인해서 그들이 시험에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우상을 무시할 수 있을 때까지는 자제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시험에 걸려 하나님과 우상 숭배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경우입니다. 한국 개신교회는 주초(酒草)를 신앙과 불신앙의 기준으로 삼도록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온 서양선교사들이 금욕적인 신앙을 표방하는 청교도들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갓 교회를 다니는 어린 신앙인 앞에서 주초를 삼가는 것은 기본 덕목이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