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성만찬에 참여하는 바른 자세. / 고전 11:17-34.

박성완 2021. 10. 20. 00:00

묵상자료 7461(2021. 10. 20. 수요일).

시편 시 35:23-25.

찬송 28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보기 힘든 풍경이 되었지만, 지난 시절에는 동네마다 엿장수 아저씨가 아이들을 몰고 다니곤 했습니다. 엿장수 마음대로 라는 말이 있지요. 잘 아시겠지만 그것은 엿장수가 가위질을 하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엿을 팔 때 가위질을 몇 번 하건 그건 엿장수 마음이라는 거지요. 그 엿장수의 가위, 가위라고 하기에는 날이 매우 무뎌서 차라리 악기 같기도 했습니다. 목동이 피리 부는 것처럼 차가닥 차가닥 하는 가위 소리가 나면, 동네 아이들이 헌 신발짝이나 빈 병을 들고 와서는 엿을 바꾸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엿을 줄 때도 일정한 기준이 없이 툭툭 잘라서, 엿장수 마음대로 주곤 했지요. 그람 수로 표기해서 정확하게 일원단위까지 계산하는 지금의 상거래와는 많이 다른 방법입니다. [백범일지]에 김구 선생도 어린 시절에 엿을 바꾸어 먹으려고, 일부러 멀쩡한 숟가락을 부러뜨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요, 엿 장수는 구한말에도 우리 동네를 돌아다닌 달콤한 장사군이었습니다.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입맛을 유혹하던 엿이, 생활이 흐르면서 사탕이나 초콜릿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긴 했지만, 엿은 지금까지도 맛있는 우리 음식중의 하나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915일 방송> a.

 

2. “주님의 성찬(17-34)”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주님의 성찬에 관해서만 말씀하고 있다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성도들의 친교의 식사 곧 애찬과(17-22) 성찬을 바르게 참여할 것을 당부하는 말씀(23-34)으로 구분되는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 개신교회는 성찬을 너무 귀하게 생각한 나머지 1년에 몇 차례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우 자주 성찬례를 가졌던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2:42), 초대교회 이래로 전해진 전통이었습니다. 매 주일 성찬을 하는 개신교회가 루터교회인 것을 알고, 저는 루터교회를 다니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특히 고린도 교회는 매우 위험한 교회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찬과 애찬(愛餐)을 구별하지 못해서 생기는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많은 교회들이 예배 후에 애찬을 통한 성도의 교제를 하고 있는데, 고린도 교회는 예배 전에 애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시골 마을마다 교회당이 있습니다만, 제가 어린 시절에는 교회당이 귀해서 큰 마을에 교회당이 있고, 그보다 작은 시골에는 교회당이 없어서 4-10km를 걸어서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새벽 일찍 집을 나서서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이 많아서 음식을 싸들고 와서 예배 전에 애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잘 사는 사람들과 못 사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애찬을 했던 모양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애찬에서 마신 포도주에 취한 이들이 예배에서 성찬에 참여할 때, 애찬의 포도주와 성찬의 포도주를 구별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 결과 애찬에서 과음한 교인들이 성찬에 참여할 때 포도주를 받고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감사를 깨닫지 못하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얼마나 잘못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 점을 나무라고 있는 말씀이 17-22절의 말씀입니다. 차제에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한국 개신교인들은 주초(酒草)를 불신자들의 특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인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주초에 대해서 매우 자유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한국에 개신교회를 전해준 분들이 주로 청교도 신앙을 가진 분들이어서 금욕을 강조했고, 또 당시 한국의 상황이 주초에 중독된 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처음에는 절제(節制)를 강조하는 등 주초를 자발적으로 조절하도록 권했지만, 그게 효과가 없자 아예 금주 금연(禁酒 禁煙)를 율법화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신앙고백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성찬을 대할 때마다 교우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바르게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성찬을 제정하실 때 하신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찬에서의 떡과 성찬에서의 잔은, 단순한 떡과 잔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 실재(實在)하는 떡이고 주님의 말씀이 실재하는 잔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진정성을 갖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곧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현존(現存)이라고 말입니다(1:1).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말씀하신, 그 떡에는 주님께서 실재하신다고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말씀하신 그 잔에는 주님께서 실재하신다고 믿고 참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신앙고백적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