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혼잡하게 하는 방언은 삼가야. / 고전 14:20-25.
묵상자료 7468호(2021. 10. 27. 수요일).
시편 시 37:4-6.
찬송 20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정조 즉위 초기에는, 침실까지 자객이 침투해 왕의 목숨을 노렸다고 합니다. 정조의 적대 세력들은 정조의 왕위 계승을 비방하면서, 죄인지자 불이근왕 이란 글을 유포시키면서 민심을 흔들었습니다. 아버지 사도 세자가 죄인으로 죽임을 당했으니, 그 아들은 국왕이 될 자격이 없다는 내용의 글인데요. 그래서 정조는 한을 품고 있었지만, 혹자는 정조가 위대한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세력으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옆에 칼을 두고 밤 새워 책을 읽은 탓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정조가 꿈꾸던 세상이 바로 수원 화성입니다. 적대 세력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겨 아버지의 한을 풀어 주었고요. 또 이듬해 왕세자를 책봉해 왕권의 틀을 잡아갑니다. 그리고 1794년부터 10년 계획으로 화성 신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는데요. 원래 화성 건설이 마무리 되 1804년 갑자년은 왕 세자가 15세로 성년이 되는 해고, 또 어머니 혜경궁이 칠순이 해입니다. 정조는 이때를 기다려서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또 자신은 상왕으로 있으면서, 자신이 국왕으로 이루지 못했던 꿈을 세자가 이루도록 도와줄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을 정조의 <갑자년의 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10년이 걸리는 공사였지만 당시 다산 정약용과 같은 뛰어난 당대의 학자들과 장인들이 기중기 등을 만들어서 화성 건설의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예정된 공사기간을 단축해 1796년 오늘인 9월 19일 축조를 완료하고 그해 10월 16일 낙성연을 가짐으로써 정조의 꿈의 도시이자 당시 첨단 신도시인 화성이 탄생합니다. 화성 성역에 착수하기 1년 전인 1793년 정월 정조는 팔달산에 올라가서 수원을 내려다보면서, 이곳에 건설할 새로운 성곽 도시를 화성이라고 불렀는데요. 사도 세자의 산소 현륭원을 옹위하는 의미에서 현륭원의 뒷산 화산의 화를 따다가 이름을 지은 겁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년 9월 19일 방송> a.
2. “이상한 언어와 예언 2(13-25절)”을 읽었습니다. 방언과 관련해서 사도는 매우 흥미 있는 은유를 사용합니다. 어른과 어린이라는 인물들을 무대에 올립니다. 어른은 사려 깊은 존재임에 비해 어린이는 생각이 깊지 못하며, 어른은 악한 일에 길들여 있는 것에 반해 어린이는 악한 일에 길들지 않았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방언의 순수한 목적을 이해하게 하는데 주목하게 합니다. 곧 방언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대로 정상어는 믿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 이사야 선지자가 했던 말을 인용합니다. 사 28:11-12의 말씀인데, 이방인에게 해야 할 방언을 자기 백성에게 말하고 있는 현실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살던 시대에는 제사장과 선지자를 포함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도주와 독주에 빠져서 말씀을 그릇 해석하고 재판을 굽게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생각이 깊지 않은 어린이들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히려 어른들이라는 사람들이 악에 길들여져서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슬픈 현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시를 읽는 시간이 부쩍 늘었습니다. 시인들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시어를 찾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평 남짓한 채마밭에 잡풀이 무성하다” “우후죽순으로 솟아나는 세상의 일탈현상, 나중에 선별될 알곡과 쭉정이”, “채소와 잡풀을 함께 바라보며 나의 믿음의 분량을 가늠해 본다” 어쩌면 시인들은 어린이 과(科)에 속할 것 같고, 악에 물든 어른들은 잡풀 씨를 퍼트리는 쭉정이과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더 냉정해진 것 같습니다. 교회의 목적과 수단에 대해서 훨씬 더 민감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도는 1세기 교회의 현상을 고발하고 있지만, 사실은 21세기에도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 생생한 실제 장면을 공개합니다. 방언집회가 열린 곳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노래하고 방언으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교인은 물론 아직 믿지 않은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그 장면은 어떻게 비쳐졌을까요? 어쩌면 잘못 찾아온 곳이라고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장면은 정상어를 사용하는 곳입니다. 기도는 아멘이라고 화답하고 싶고, 설교는 감화와 감동의 연속입니다. 찬송은 기쁨과 감사로 가득 채워줍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더 이상 방언으로 혼잡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방언은 믿는 사람을 위해, 정상어는 이방인을 위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