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의 질서를 위해서. / 고전 14:26-40.
묵상자료 7469호(2021. 10. 28. 목요일).
시편 시 37:7-10.
찬송 24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화성의 도시적 면모를 잊은 채 일본 사람들이 명명한 대로 수원성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성곽만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또 보존하고 있지만, 원래 화성은 신도시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정조는 19세기의 문이 열리는 1800년 음력 6월 28일 한 달간 투병하다가 갑작스럽게 한 많은 세상을 떠났는데요. 그래서 정조가 자신의 노년을 보내면서 위대한 제국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던 화성은 정말 정조에게는 꿈의 도시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도 정조에 대한 이야기들은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로 만들어 지면서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지요. 조선 시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근대 시점에 서 있었던 위대한 군주 정조,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요, 하지만 정조의 꿈이 이루어졌더라면, 일제 강점기 대신에 조선이 동아시아를 이끄는 나라가 되었을 거라고 한번 생각해 봅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으로 또 정조의 한과 꿈이 서려있는 수원 화성을 다시 바라보게 되고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년 9월 19일 방송> b.
2. “교회 안에서의 질서(26-40절)”을 읽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을 사회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회생활은 작게는 가정이기에 가정생활이라고 하고, 마을과 교회 그리고 학교 그리고 나라와 같이 넓게 퍼져갈 수 있습니다. 이런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질서가 유지되어야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규정을 만들어 서로가 지키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교회 생활에서 지켜야 할 질서에 대해서 사도의 권고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 안에서 질서가 아니라 무질서한 일들이 더러 생겨나서 이를 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문제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질서의 문제는 옛날 일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사도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찬송인도자, 교사, 설교자, 방언자와 그 방언을 해석하는 자 등등을 열거하면서, 모두가 교회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임을 긍정합니다. 그런데 방언을 하는 자는 두 사람이나 많아도 셋이 차례로 말하고 해석도 해 주어야 하는데, 만일 해석자가 없으면 교회 안에서는 혼자 하거나 하나님과만 말하라고 권합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듣게 된다면 어떨 것인지 충분히 예상이 됩니다. 설교자도 두 세 사람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새겨듣기를 권합니다. 이때도 누군가가 계시를 받았다면 그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합니다. 무질서를 막아서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여자 성도들이 말하는 것을 금하는 전통을 언급하고 있는데, 율법에 따른 것(창 3:16)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궁금한 것이나 하고 싶은 말은 집에 돌아가서 남편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자 성도들이 입을 열면 너무 많은 말이 쏟아져 나오는 것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구절로 인해서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자 성도들이 교회에서 중직(重職)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장로는 물론 목사직까지도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현상은 여자들에게도 배울 권리와 참정권 등이 부여된 결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누군가의 전유물(專有物)처럼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설교자 역시 이를 성령의 선물로 받아야 하는 때문입니다. 이렇듯 교회 생활에서의 질서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필요한 일입니다. 가끔 무질서한 교회 문제 때문에 화를 내고 속을 태우다가 교회를 옮기거나 아예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가장 민주적이고 가장 바람직한 공동체를 유지해야 할 교회생활이, 몇 몇 고집불통인 지도자들에 의해서 어려움에 처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교회의 행정과 재정을 독재자처럼 마음대로 하는 것을 권위라는 말로 미화까지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 역시 시대적 배경을 전하고 있음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수 10:12-13나 욥 26:7은 천동설의 근거가 된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수천 년 전의 사람들은 태양 중심의 천체관을 가졌습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움직인다는 이론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의 공통된 이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성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거나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권위가 떨어질 일도 아닙니다.
3.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과 함께 보내주신 남도 창원 감은, 절로 붉어질 수도, 절로 둥글 수도 없는 이치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