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믿음은 무형이며 불가시적인 최고의 가치. / 고전 15:1-11.

박성완 2021. 10. 29. 00:00

묵상자료 7470(2021. 10. 29. 금요일).

시편 시 37:11-13.

찬송 3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이클 온닷지의 소설 [잉글리쉬 페이션트] 가운데서 인용합니다. “달을 보면서 실은 그대를 보리라.” 포스터 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 문학가인 마이클 온닷지의 장편 [잉글리쉬 페이션트], 이 작품으로 마이클 온닷지는 1992<부커 상>을 받았고, 이 작품이 영화화 되면서 더 잘 알려지게 되었지요. 전쟁에 나간 아버지와 연인을 찾아 전쟁터에 저항한 헤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쟁터에서 생긴 아이까지 잃어야 했지요. 전쟁은 끝났지만 헤나는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는 영국인 환자 알마씨와 함께 폭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빌라에 남습니다. 한편 헤나가 사랑한 남자 카라바지오는 조국을 배신한 알마씨를 찾아 원수를 갚기 위해 그 곳 빌라에 오는데, 영국인 환자 알마씨의 정체가 차츰 들어나지요. 알마씨는 사막에서 물의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막에서 전쟁을 해야 하는 참전국에서 물의 지도는 대단히 중요했고, 참전국들의 쟁취 목표가 됐지요. 그런 어느 날, 알마씨는 친구 아내인 케서린을 사막에서 만나는데, 케서린은 시와 비를 사랑하는 여인이었지요. 사막을 사랑하는 알마씨, 물을 사랑하는 케서린,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빠져듭니다. 케서린은 알마씨에게 말하지요. “당신이 나를 사랑해 준다면, 그 일을 숨기지 않겠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 일을 숨기지 않겠어요.” 알마씨는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여자, 그녀의 목에서 움푹 들어간 곳을 <알마씨 해협>이라고 이름 붙이고는, 그곳 만큼은 자기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알마씨는 말하지요. 자기가 가장 미워하는 것은 바로 소유권이라고. 그렇게 소유할 수 없는 자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씁쓸하고 허망한 것이었지요. 알마씨는 케서린에게 물어봅니다. 가장 행복한 때는 언제냐고요. 케서린은 대답하지요. “지금알마씨가 다시 묻지요, 가장 불행한 때는 언제냐고, 그녀는 대답합니다. “지금이라고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920일 방송> a.

 

2. “그리스도의 부활(1-11)”을 읽었습니다. “나는 왜 기독교도가 아닌가란 책으로 유명한 버틀란트 러셀의 책을 가끔 읽곤 합니다. 그는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보았던 사람들에 속할 뿐 아니라, 네 살 때 양친을 잃은 것이 그가 세상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의심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계기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기독교의 핵심인 하나님 중심 사상을 날조한 신과 교리로 규정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유혹하는 기성종교의 악한 면들을 파헤친 것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란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을 찾는 인생 여행도 세 번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얻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믿음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수십 년을 함께 얘기하고 다투고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서도, 믿음과 이성의 과제들은 여전히 풀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의 부재가 가져오는 결과들은 허망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사도의 믿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말씀대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베드로와 12제자들 그리고 500명의 성도들에게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 격인 예수님의 혈육인 야고보와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까지 나타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부활 신앙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오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을 수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부활의 증인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은 주님의 은총일 뿐 바울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 가장 귀한 소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신앙,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입니다. 이런 신앙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얻는 신앙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이성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축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믿음은 사람의 행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선물이라고 고백했습니다(2:8). 우리는 손으로 잡거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가치들보다, 훨씬 더 높고 귀한 가치들이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머리로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가령 사랑이라든지 희망이라든지 평화와 행복과 같은 것들입니다. 버틀란트 러셀이 강조하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하는데, 그 행복 역시 무형의 가치이고 불가시적인 가치입니다. 그래서 그 역시 3번씩이나 결혼을 했지만 끝내는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즘 저는 저의 반려견인 순진이를 통해서 믿음의 가치를 십이분 깨닫고 있습니다. 순진이는 한 순간도 제 곁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제 눈길이 미치는 거리에 앉아 있거나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넘치는 시선으로 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화장실에 있는 순간까지도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가 저를 보면 안도의 숨을 내 쉬며 저와 동행하려 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향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의 순진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몽학선생(παιδαγωγος)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