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좋은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 / 느 5:1-19.
묵상자료 7482호(2021. 11. 10. 수요일).
시편 시 38:10-14.
찬송 37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그가 말했다. “숲의 나무들, 낙엽과 축축한 땅 냄새는, 무언가를 연상시켰다.” “대로를 따라 나아갈수록, 이미 그 길을 걸어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로뉴 숲의 나무들, 낙엽과 축축한 땅 냄새는 무언가를 연상시켰다. 조금 전 아이의 방에서도 똑 같은 감정을 느꼈다. 지금껏 잊고 싶었던 것, 아니 어지러울까봐 두려워서 뒤돌아보기를 애쓰는 사람처럼 생각하기를 피해온 것, 그것이 서서히 솟아오르려 하고 있었고, 이제 난 그걸 정면으로 마주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패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작은 보석]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선정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인간의 운명을 기억의 예술로 환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작가 본인의 수상 소감은 이러했습니다. “과거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을 생각해 봤을 때,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기쁘지만 내가 상을 받은 이유를 모르겠다.” 모르겠다. 어쩌면 그로부터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삶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잊고 싶었던 것, 왜 잊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생각하기를 피해왔다. 왜 그토록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썼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축축한 낙엽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하나의 고리가 되어, 꼬리를 물기 시작합니다. 잊고 싶었던 것을 떠올리게 하고, 돌아보지 않았던 것을 돌아보게 합니다. 이미 과거라는 상자 안에 봉인된 것들. 이제 와서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어쩔 수 없는 것들. 굳이 뭐 하러 떠올리고 돌아보나, 했던 날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생각해 보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어떻게 앞을 볼 수 있을까요? 소용없는 것들 어쩔 수 없는 것들은 버려야 할 것들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껴안아야 하는 것들이며, 가야할 길을 비춰줄 촛불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4년 11월 17일 방송>
2. “백성이 불평을 터뜨리다(1-19절)”을 읽었습니다. 넉넉하고 평화로울 때는 원망과 불평할 대상도 문제도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런 때는 마음도 너그러워지는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매사에 쪼들리고 고통스러울 때는 눈에 보이는 것들도, 발에 밟히는 것들도 모두가 짜증스럽고 미워지기만 합니다. 왤까요? 최근 저의 가족 중에는 동시에 불행한 일들이 봇물처럼 쏟어져 나와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당황하는 누이가 있습니다. 주변에서는 물론 자신 스스로도 평균 이상의 신앙인으로 살고 있다 생각해 왔는데 말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불행이란 악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우리들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심정을 잘 읽을 수 있게 합니다. 몇 마디 옮기면 이렇습니다. “살아 보겠다고, 목에 풀칠이라도 하겠다고, 아들 딸을 잡혔다.” 라는 사람으로부터 “황제에게 세금낼 돈이 없어서 밭도 포도원도 모두 잡혔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들과 딸들이 종으로 팔려가지만 어떻게 손쓸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불평과 아우성 바탕에는 정의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며, 사랑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는 신앙의 문제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나 부분적으로 바라보고, 전체적으로 사고하질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련과 역경이 화가 아니라 복인 것을 알지 못하곤 한다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은총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운 시절에는 삶을 더 쪼들리게 하고 힘들게 하는 문제들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고리대금(高利貸金)을 하는 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당장 먹을 것 입을 것이 필요한 사람들은 먼 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고 당장 배고프다며 울고 보채는 자녀들을 보는 게 안타까워 고리의 빚을 지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아무런 죄책감없이 은행이라는 기관에서 이자놀이를 하고는 있지만, 유대 사회에서는 고리대금을 금하였고, 이자없이 돈을 빌려주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려는 인도주의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옷을 전당잡힐 경우, 해 지기 전에 그 옷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알몸을 가려야 했기 때문입니다(출 22:25-27).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전통이 어려운 시절이 되자 여지없이 깨트려진 것입니다. 지도자 느헤미야는 자신이 총독으로 마땅히 누려야 할 급료마저 받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처지에서는 그런 급료마저도 위화감을 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불평의 소지를 줄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불현 듯 YMCA의 총무를 역임했던 현동환 선생이 그립습니다. 그는 이승만 정권에서 사회부장관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난지도에 살면서 커피를 마시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하루 한끼를 금식을 실천하였는데, 달러를 아끼고, 평화를 유지하며, 고아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합니다. 좋은 지도자가 우리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3. 새 나이 계산법에 의하면 제 나이는 62살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