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절박할 경우에만 금식하자. / 느 9:1-25.

박성완 2021. 11. 15. 00:00

묵상자료 7487(2021. 11. 15. 월요일).

시편 시 39:6-8.

찬송 44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녀가 말했다. “똑 같이 나누자면서 10에서 절반이라고 내 손에 쥐어 준 것은, 돌아서 보니 6이었다.” 대놓고 말하자니 치사하고, 말 안하자니 마음 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팥 든 빵을 절반씩 나눠 먹자하고 반으로 눴는데, 단팥이 한쪽에만 쏠린 걸 보고 그걸 먹어 버릴 때. 같이 좋은 거 구경하려가서는 냉큼 먼저 좋은 자리 차지하고 앉을 때. 함께 걸어가는데 자기 속도로 저만치 앞서 걸어갈 때. 만약에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사람이라면, 진심마저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지요. 그 서운함 때문에 단팥 없는 빵은 더 맛이 없을 거고, 덜 좋은 자리에서 하는 구경이 침울해 질 것이며, 계속 뒤통수 쳐다보고 걸어야 하는 상황이 자존심 상할 겁니다. 똑 같이 나누자 해 놓고, 함께 하자고 해 놓고, 저 먼저 좋은 걸 취하는 게 별 수 없는 사람 마음이지 하면서,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럴 때 한번이라도 돌아봐 준다면, 서운함은 한 순간에 가실 텐데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문제는 돌아보지 않는 것 돌봐 주지 않는 데 있습니다.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늘 돌아보지 않고 습니다. 돌아보는 사람은 늘 돌아봅니다. 그들은 기척 없이 돌아보고 생색내지 않고 돌봅니다. “똑같이 나누자면서 10에서 절반이라고 내 손에 쥐어 준 것, 돌아서 보니 6이었다.” 황혜경 시인의 <돌보는 부류>에 나오는 시구입니다. 어느 새 육을 받은 사람의 마음이 되어, 여운이 깁니다. 시에 나오는 돌보는 부류는 이런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남이 잘못해서 밟은 꽃을 쪼그려 앉아 꽃대를 세우고, 흙을 다독이는 할머니. 그에 비해 돌보지 않는 부류는 이걸 반복하지요. 아는 것인 줄만 알았던 몰랐던 것인데, 또 모르고 밟는 순간. 맞아요. 모르고 밟았을 겁니다. 아는 줄 알았지만 모르는 것.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의 기분이나 마음 상태가 그렇지요. 그러니 늘 돌아보고 돌봐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계산보다는 배려를 먼저 아는 사람, 돌아보는 부류가 되길 바랍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41016일 방송>

 

2. “금식하며 죄를 뉘우치다(1-25)”을 읽었습니다.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은 유대 민족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두 번 다시 이런 엄혹한 재난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반성운동이 일어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누가 앞장서지 않았더라도 진지한 회개운동에 온 백성들이 참여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대 백성들은 베옷을 걸치고 흙을 뒤집어 쓴 채 금식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위인 지도자들이 단 위에 서고, 하루 6시간을 율법서를 읽고, 이어 6시간을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사람의 목청 좋은 레위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역사를 정리해서 백성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하는데, 첫째는 하나님은 창조주로 세상과 인간을 만드셔서 예배 받으실 분이신 것과, 둘째는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셨으며, 셋째는 애급에서 종살이하던 조상들을 유대 광야로 이끌어 해방시켜주셨고, 넷째는 광야 생활 속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신 일과,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율법을 내려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셨으나, 다섯째 백성들은 교만하고 고집이 세어 금송아지를 섬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으나 버리지 않으셨고, 여섯째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 온갖 좋은 과일과 기름진 땅과 음식을 주셨으나, 엇나가기만 하다가 하나님을 반역한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어떤 일에 몰두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힘없는 정치가들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할 때나, 종교인들이 기도나 자신들의 경전공부에 전념하려고 할 때, 금식이라는 방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저도 젊은 날에는 연초에 성경을 1독하기 위해서 3일 동안 금식하곤 했었는데,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커다란 식수 통 하나만 들고 토굴에 들어가서 소리를 내어 성경을 읽었는데, 그 결과에 언제나 만족하였습니다. 물론 깊은 묵상은 할 수가 없고 빠른 속도로 읽기에만 전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의 회개하는 기도운동은 자발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강제적인 동원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큰 호응을 얻었을 것입니다. 시기적으로 적절했으니 말입니다. 70년이란 포로생활 동안 그들은 시련의 한복판을 경험한 세대들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신앙적 반성을 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율법준수를 철저화하기로 다짐하고 다짐한 이른바 율법주의자들이 될 수 밖이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 고초를 겪은 것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죄악이라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한다는 반성에 이르렀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