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력. / 느 13:1-31.
묵상자료 7492호(2021. 11. 20. 토요일).
시편 시 40:6-7.
찬송 37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연습, 연습 또 연습.” 우리나라 국민의 70%가 아파트를 비롯한 공동주택에 살고 있고, 공동주택에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게 층간 소음이지요. 층간소음 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 견디기 힘든 것이 미안하게도 음악소리입니다. 정학하게 말하면 음악 소리가 아니라, 음악 소음이지요. 옆집인지 아랫집인지 정확하게 방향을 알 수 없는 어디선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르신들이 왜 바이올린을 깽깽이라고 했는지, 온 몸이 귀가 되어 체감합니다. 두 소절 연주하고 다음 소절에서 음이 틀립니다. 잠시 소음이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모양입니다. 다시 소음이 들립니다. 무사히 넘어가지 못합니다. 깽깽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소음이 무한 반복되면서, 이웃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을 안겨주지요. 흥미로운 것은 몇날 며칠이고 석 달 열흘 똑 같은 소음이 반복되는 집에서는, 어느 순간 더듬거리면서도 제법 한곡을 완주하더라는 겁니다. 소음이 드디어 소리가 된 거지요. 그럴 때면 마치 내가 그동안 참고 기다리며 연습시킨 선생이라도 된 듯 흐뭇한 마음이 됩니다. 듣는 사람도 괴로웠지만, 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괴로웠겠습니까? 전 세계클래식 연주가들에게 꿈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카네기 홀과 관련해서는 이런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맨해튼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마주 오는 한 노인에게 물었다고 하지요. “카네기 홀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연습, 연습 또 연습.” 길을 잃고 헤맬 때가 있지요. 길을 잃었기에 실패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가야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알아내지 못하기에 무능하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지요. 진실은 지금 연습 중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쉬운 연습이 있을까요? 어려울 뿐 아니라 지루하기까지 하지요. 그러나 지름길인줄 알고 간 길이 오히려 돌아가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돌아가는 길이기만 하다면 다행이지요. 구멍일 때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고 싶을 때마다 인생의 내비게이션을 찾고 싶은 요행을 버리고, 앞서 카네기홀의 일화를 떠올립니다. “연습, 연습 또 연습.”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다보면, 옆집 아이처럼 석 달 열흘 내내 땅 바닥에서 깽깽이 소음만 내다가, 석 달 하루째 소리가 되어 공중으로 도약하는 순간이 올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4년 11월 19일 방송>
2.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오다(1-31절)”을 읽었습니다. 지난 가을 각 교단 총회에서는 목회자의 이중직 논란이 뜨거운 감자가 됐다고 합니다. 10여 년 전 중국 청도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세미나에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3일 동안의 세미나가 끝나고 한 중국 목사님이 제 방을 찾아왔습니다. 자녀가 두세 명 있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너무 힘들다면서, 자신의 교회를 소개하였습니다. 교인들은 500여명 모인다고 했고, 재정도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목회자 생활비를 500위안(당시 환율로 한화 10만 원 정도)를 받는데, 그것으로는 식사를 해결할 수 있을 뿐 교육비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주인 격인 장로들은 목회자가 가난해야 설교와 전도를 잘 할 수 있다며 고난을 강조한다고 합니다. 그리스 정교회나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들과는 달리, 개신교의 목회자들은 가족이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과 비슷한 생활비가 필요한 게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도 도시의 큰 교회를 제외하고는 70% 가까운 교회들이 50명 미만의 미자립교회 라는 현실은 목회자들로 하여금 이중직을 택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 결과 목회자가 심리적으로 갈등을 겪는데, 정체성의 혼란, 낮은 자존감, 그리고 죄책감이라고 합니다. 목회자의 이중직에 용기를 준 사람은 최초의 선교사 바울 사도입니다. 그는 천막과 구두를 수선하는 직업을 가지고 선교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느헤미야가 파사왕 아닥사스다 32년에 황제를 뵈러 갔다가 얼마동안 예루살렘을 비웠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이 옛날로 돌아간 듯하여, 화를 내고 다시 재정비하는 명령을 내렸다는 내용입니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 사제 엘리샵은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있는 도비야란 사람을 성전 안뜰에 거처할 방을 내 주었는데, 그 방은 성전 기물과 곡식과 향을 두는 방이었습니다. 이 도비야란 위인은 암몬사람으로 유대인과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으로, 느헤미야가 성벽을 쌓을 때 적극적으로 반대한 산발랏과 함께 활동했던 사람이었습니다(느 2:10, 19). 느헤미야는 도비야의 세간을 밖으로 내던지고 본래 목적대로 바꾸었던 것입니다(8-9절). 레위인이 받을 몫을 받지 못하자, 자신들의 역할을 저버리고 일하러 나가게 되어, 느헤미야는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바치게 해서 레위인들의 몫을 지불하였다거나(10-13절), 안식일에 술을 빚거나 장사를 하거나 일을 하는 등 소홀히 여기는 잘못을 크게 꾸짖고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한 사람 지도자의 신앙이 나라 전체 백성 전부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가를 깨우치게 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