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자. / 학 2:1-9.

박성완 2021. 12. 11. 00:00

묵상자료 7513(2021. 12. 11. 토요일).

시편 시 44:22-24.

찬송 23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온 더 팁 오브 원스 텅(on the tip of ones tongue), 슐라 뿐따 델라링과, 오디프 말통, 끼일리 오토 싸 필. 이게 다 무슨 말들 일까요? 어떤 단어나 이름 표현이 정확히 생각안 날 때, 쓰는 영어 이태리어 아프리카어 등입니다. 언어는 다르지만 모두다 선뜻 입에서 나오지 않는 갑갑함을 표현하는데, 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이런 공통점을 발견해낸 심리학자 베넷 슈왈츠. 그는 그런 표현들 중에서, 가장 시적인 것은 한국어의 혀끝에서 맴돌다.”라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심리학자인 데니얼 셔터는 [기억의 일곱 가지의 기억] 책에서, 어떤 이름이나 단어가 혀끝에서 맴돌기만 하고 정확히 생각이 안 나는 여러 가지 예를 들었는데요. 가령 영국의 한 부수상은 당시 지어지던 밀레니엄 돔 경기장의 건설비용이 전국 복권에서 충당된다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국 복권이라는 단어가 얼른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쩔쩔매다가 제비뽑기에서 충당된다고 해서 야유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떤 녀석은 한 모임에서 학창시절 절친했던 동창생을 만났는데,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당황했지요. 혀끝에서 맴돌기만 하고,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는 단어나 이름 표현들 중에서도, 특히 가장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사람 이름이라고 하는데요. “평소 난, 사람이름을 잘 못 외우겠어.” “사람 이름 잘 기억이 안나.” 하는 말들이 괜한 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생각의 막힘은 셔터에 의하면, 정신없음의 어수선함이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소멸과는 또 다른 종류의 망각 이라고 하는데요. 분명 머릿속 어딘가에 숨어 있어서, 건드리기만 하면 튀어나올 것 같은데,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손이 미치는 곳의 바깥쪽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완전히 기억해서 사라진 것보다, 더 아슬아슬한 찌증을 불러일으킨다는 거지요. 무엇이든 아예 안 될 때 보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일이 이루어질 듯 말 듯, 어떤 결정적인 순간의 바로 직전에 놓였을 때가, 더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거겠지요. 하지만 달리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그럴수록 천천히 손이 닿는 데까지 더듬어보고 노력해 보고, 나아가 볼 수밖에 없는 거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126일 방송>

 

2. “새 성전이 먼저 성전보다 영화롭다(1-9)”을 읽었습니다. 이집트를 여행하신 분들이라면, 나일 강변의 고대 도시 룩소의 카르낙 신전의 위용에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아스완 댐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수몰위기에 있던 파라오 2세의 아부심벨 신전에서는, 현대 과학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네 개의 신상에 햇빛을 비추게 할 수 없는 고대인들의 정확한 기하학을 자랑하는 가이드의 얘기에 넋을 잃을지 모릅니다. 여기에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과 런던의 성 바울 성당, 그리고 서울의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어깨를 겨룰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어찌하여 신전을 크게 짓느냐고 말입니다. 찾아오는 신도수가 많기 때문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그곳에서 하는 활동이 많기 때문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성전의 크기에 대해서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도 포로기 이전의 솔로몬의 성전에 비해서 매우 초라한 것이 문제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크기에 대한 불만이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총독과 대제사장 그리고 백성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힘을 내어라, 내가 너희 곁에 있어 주리라. 약속한 대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을 것이니 겁내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크게 짓는 이유가 밝혀진 것입니다. 첫째는 작은 성전에서는 겁과 두려움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초라한 성전에는 하나님께서 머물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크고 웅장한 성전, 아름답고 화려한 성전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에도, 은총을 베푸시기에도 합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일까요?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일까요? 아니면 사람들의 생각이었을까요?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두말할 여지없이 사람의 생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총독으로 온 사람도, 제사장이라는 사람도, 그리고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도 모두 말입니다. 그들은 두 번 다시는 비참한 전철을 밟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라한 성전에는 하나님께서 머무시기에 불편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는 한 가지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눈과 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가시적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뿜어 나오는 신앙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을 것이니, 겁내지 말아라.”는 말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임재요, 하나님의 현존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신앙은 눈과 손으로 보고 만지는 것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서 자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