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민들이어야. / 슥 8:9-17.
묵상자료 7520호(2021. 12. 18. 토요일).
시편 시 45:16-17.
찬송 22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텍사스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제임스 팬 베이커 교수는, 사람들이 관계의 정도에 따라서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관계가 좋을 땐 사용하는 언어도 비슷하지만, 관계가 나쁠 땐 경멸감을 나타내는 한 두 개의 공통된 언어를 빼면,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가령 팬 베이커 교수팀은 유명한 정신의학자이지요. 프로이트와 융이 7년 동안 주고받았던 편지를 분석했지요. 그 결과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을 때는, 편지 속에 등장하는 명사나 대명사 등이 대게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하자, 그 경멸감을 다는 단어를 제외하면, 쓰는 단어들이 크게 달라졌어요. 똑 같이 시를 쓰는 연인이고 부부였던 실비아 플러스와 테드 휴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이가 좋을 때는 두 사람의 편지 등에 쓰는 언어가 비슷했지요. 하지만 사이가 악화되자 사용하는 언어들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팬 베이커 교수는 유명인사가 아닌 일반 학생들을 대상으로도, 비슷한 실험을 하고 비슷한 결과를 얻었는데요. 가령 에세이를 쓰게 하는데, 쇼핑 같은 가벼운 주제의 제목을 주면 학생들은, 뭐 같다 이를테면 일종의 같이, 가벼운 단어들을 많이 썼지요. 하지만 딱딱한 주제를 주면 대부분이 다 어렵고 건조한 단어들을 사용했습니다. 대상에 따라서 자신들의 언어도 비슷하게 바뀌는 거지요. 뭐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실험결과일 텐데요. 팬 베이커 교수는 그런 현상에 <언어 스타일 어울림>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언어스타일 어울림> 때문에 연인이든 동료 든 스승과 제자든 간에, 그들의 대화를 잠깐만 들어봐도, 그들의 관계가 어떤 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문득 한 격언이 생각이 나네요. “같은 농담을 듣고 웃는 부부는 절대 헤어질 염려가 없다.” 이 말이요. 같은 농담에 똑 같이 웃는다는 거, 언어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뜻이겠지요. 언어 스타일이 같다는 건 사이가 좋다는 뜻일 테고요. 그러니까 당연히 헤어질 염려도 없는 거겠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요, 그 반대로 가능하지 않겠어요? 언어가 비슷한 건 사이가 좋다는 뜻이니까, 사이가 좋으려면 언어를 비슷하게 맞추는 것도 한 방법 아닐까요. 아닌 게 아니라 상대의 언어에 비슷해지려고 하다보면, 상대방의 말이나 말이 품고 있는 뜻이나 뉘앙스를 더 잘 듣고 이해하려고 하게 되니까, 당연히 사이가 좋아지겠지요. 요즘 누군가와 소원해졌다든지,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든지 한다면, 언어의 공통정도와 차이 정도부터 점검해 보시면 어떨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년 12월 20일 방송>
2. “새 날을 약속하심(9-17절)”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움에 대한 특별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새해 첫 태양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 서광에서 무엇인가 신비한 기운이 쏟아져 감쌀 것 같은 환상을 가집니다. 새날에 대한 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새날을 말씀하실 때, 그들은 귀를 기우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 내용을 묵상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새날은 평화를 심어주는 날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날이란 역사에 전무후무한 새로운 시대를 암시하는데, 그 주된 내용은 평화였습니다. 전쟁이나 다툼이 없는 조화로운 세상이며,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세상을 뜻합니다. 둘째, 거짓과 불의를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날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과 나라들은 저마다 정의롭고 바르다고 주장을 합니다. 문제는 모두가 바르게 살고 있다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다툼과 싸움은 멈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모순은 무엇일까요? 모두가 인정할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말 중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말이 있습니다. 공평무사한 선의의 경쟁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올바른 운동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새날의 주인은 야훼 하나님이십니다. 유다가 그 하나님이 뽑아 세우신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엄청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역사의 주인공처럼 나서자고 선동합니다만, 이것은 교만입니다. 지금 서구 기독교회가 몰락하고 그 전철을 한국 기독교회도 밟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자만한 때문에 벌어지는 필연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베드로 성당이나 여의도 어느 교회처럼 매머드 교회당을 짓고 세력을 뽑내는 일이 아닙니다. 공의와 사랑 하수처럼 흐르게 하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입니다(호 6:6, 12:6, 암 5:24). 비천한 마구간을 택하신 하나님의 뜻을 되묻는 성탄절이어야 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