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출발점. / 요 6:60-71.
묵상자료 7567호(2022. 2. 3. 목요일).
시편 시 56:1-3.
찬송 8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군자유삼외(君子有三畏). 군자(君子)에게는 세 가지 두려움(三畏)이 있다. 공자의 말씀이다. 그 세 가지 두려움이란 무엇인가? 천명(天命)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대인(大人)을 두려워하는 것이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인은 천명을 얕잡아본다. 천명(天命)이 무엇인지 모르는 까닭이다. 소인은 대인을 가볍게 대하고(狎),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긴다(侮). 그래서 소인에게는 세 가지 만용(蠻勇)이 있다고 한다. 불외(不畏)와 압(狎) 그리고 모(侮)가 소인의 세 가지 만용이다.
목숨을 감사하고 소중이 받드는 마음이 곧 천명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남을 소중히 받들고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이를 들어 대인(大人)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질고 곧고 바른 삶을 위하여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면서 살라는 당부가 성인의 말씀이다. 소인은 제 목숨만 소중한 줄 안다. 그래서 모질고 영악하게 군다. 소인을 남을 낮추어야 자신이 높아진다고 고집한다. 그리고 소인은 부끄러워할 줄 몰라 뻔뻔스럽고 염치없이 산다. 이러한 소인이 어찌 두려워할 줄 알겠는가?
군자는 천지를 두려워하고, 세상을 두려워하며, 만물을 두려워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겁이 나서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가짐일 뿐이다.” 윤재근, <내 마음속 조용히 살어리랏다>, p.120.
2. “믿지 않는 제자들(60-65절)”과 “베드로의 신앙고백(66-71절)”을 읽었습니다. 기독교회의 성찬례에 대해서 논란은 제자들로부터 시작됐음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은유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반대에 부딪혔다는 말입니다. 이성적으로 뿐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일반 사회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서 기독교회를 반대하는 정치 세력으로부터 얼마나 큰 저항에 부딪혔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습니다. 주후 140년경에 쓰였다고 믿어지는 저스틴의 <변증서 1>에 의하면, 당시 초대 기독교회는 의심을 살만한 빌미까지 주었음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말씀의 예배가 끝난 다음에는 세례 받은 사람들만 남아서 두 번째 예배 성찬의 예배를 드렸는데, 이때는 교회당 문을 걸어 잠그고 진행했는데, 문틈으로 “내 살을 먹어라.” 그리고 “내 피를 마시라.”가 들렸으니, 사람들은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누군가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줄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변증서는 오해의 불씨를 해소시키기 위해서 꺼낸 변명하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회가 주류 종교로 등장하면서 더 이상 박해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궁금증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의 차원을 이성의 차원에 머물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의 차원이란 피조물이 자신의 조물주를 긍정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고백이라는 방법으로 가능한데,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조물주를 선뜻 인정하거나 존중하는 걸 꺼려합니다. 그런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에서 서서히 멀어져 갑니다. 마치 부모의 그늘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독립이란 성숙의 단계가 아니라, 자신을 뿌리를 부정하는 차원입니다. 마침내 주님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이른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등장한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막 8:27-30, 마 16:13-20, 눅 9:18-21)는 그 고백의 구성과 내용이 교육적이고 신앙적입니다.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시라고 밝힙니다. 훗날 기독론의 근거자료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고백하는데서 신앙은 출발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