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 / 요 8:31-47.
묵상자료 7575호(2022. 2. 11. 금요일).
시편 시 57:10-11.
찬송 20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업무 때문에 한 회사의 총무부서에 있는 이와 전화를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의논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생겼습니다. 자신도 저쪽 사람도 서로 왜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느냐면서 언성을 높이게 된 것입니다. 결국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서로 차갑게 전화를 끊었지요. 그런데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런 우연은 드라마에서나 생기는 줄 알았는데, 한 달 후쯤 바로 그 회사 지정 거래처 회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최소한 한 달에 두 세 번은, 필히 그 직원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다시는 안보리라는 생각에 서로 잔뜩 화를 냈는데, 정말 부담스러웠지요. 기억력이 아주 나쁘지 않은 한, 그 쪽도 마찬가지 일터였습니다. 그렇다고 새삼 화해하기에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그렇다고 마냥 굳은 얼굴로 대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어정쩡하게 웃으면서 대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내심 불편하기 짝이 없어서, “그 때 좀 참을 걸”, 이렇게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덕분에 누구든 절대 다시는 안 볼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쉽게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아야지, 생생한 깨우침을 얻기도 했지요.
그런가하면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보니, 모두들 비슷한 경험들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말다툼을 하게 된 낯선 사람이, 다음 날 보니 새로 부임해 올 상사였다던 지, 혹은 시어머니 될 분이었다든지. 그야말로 드라마에서나 지어낸 것 같은 경험들이 한두 번은 다 있었던 겁니다. 다시는 보게 될 일 없을 줄 알았던 사람들과 가깝게 서게 되는 우연이, 일상에서도 실은 흔한 것이지요. 즉 세상은 생각보다 아주 좁다는 것, 낯선 사람을 대할 때 명심하고 기억해야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KBS FM 1, FM가정음악, 2008년 2월 1일 방송>
2.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31-38절)”을 읽었습니다. 재수생으로 대입시험을 준비할 때, 중학교 때 생물을 가르쳐주셨던 선생님 댁에서 방을 빌려 신세를 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긴긴 겨울밤이었는데, 선생님은 심심하셨는지 저와 신앙토론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진땀을 흘렸던 기억밖에는 없지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습니다. 진리란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이라고 사전을 설명하는데, 당시 저는 “변치 않는 사실”이라고 답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대다수의 종교는 자신들의 신앙을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살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가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리가 어떻게 자유케 하느냐는 연역법적 추론이 아니라, 자유케 하는 것이 진리라는 귀납법적 추론이 가능해 진 것입니다. 우리들 인간의 삶을 묶어놓고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와 죽음입니다(34-36절). 죄와 죽음에서 자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진리이신 예수님뿐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운명하실 때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공관복음서는 말씀합니다(막 15:38, 마 27:51, 눅 23:45). 더 이상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미국 버지니아 주의 주지사였던 패트릭 헨리가 리치몬드에서 했던 연설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노예로 살기 보다는 자유인으로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엿보게 하는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의 의미와 가치를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리스는 “자유냐? 죽음이냐?”를 국가의 표어로 삼았고, 미국 남부연합 국가에도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가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위한 생명을 내건 투쟁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죄와 죽음이라는 사슬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절망 한복판에서 그는 자신을 건져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고, 또 다른 한 사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시 121:1) 라고 절망하던 시인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시 121:2)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그의 영혼의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자유를 빼앗긴 체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악습과 제도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성별로 피부색으로 학력과 권력 등으로 말입니다. 사람들이 천국을 희망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가 왕노릇 하시는 때문이며, 그리스도를 모시는 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