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직업이 아니라 소명으로 일하지 않으면. / 요 10:1-18.

박성완 2022. 2. 16. 00:00

묵상자료 7580(2022. 2. 16. 수요일).

시편 시 59:1-3.

찬송 3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큰 오빠에게>    애써 안부 전화인척 했지만, 큰 오빠는 속마음을 감추는 연기가 좀 서투르더군요. 수화기를 통해 걱정의 먹구름이 꾸역꾸역 삐져나왔다고나 할까. 며칠 전 지나는 길에 들렸다는 작은 오빠는 더 자연스럽던데. 아무튼 한번 막내는 영원한 막내일 수밖에 없는 데는, 두 오빠의 공로가 크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우리라고 무슨 비법이 있을 리 없으니, 손님수도 줄고 매상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두 오빠가 그리 번갈아가면서 애태우지 않아도 될 만큼은, 기반 잘 다져 놨다는 것도 알려드리고 싶네요. 우리에게 이번 고비는 두 번 째잖아요. 몇 년 전 첫 번째 고비 겪을 때, 배우고 느낀 것들이 이번에 큰 도움이 되고 잇지요. 더 많이 벌려고 애를 태우는 대신에 능력껏 일한 대가를 알뜰하게 쓰는 것이 유일한 삶의 비법이라는 걸, 우리는 이미 그 때 깨우쳤으니까요. 요즘 외국에서는 난데없이 세계대전 중에 주부들의 생활상과 그 당시의 조리법들이 주목을 받는다고 하지요. 돈도 없지만 설령 돈이 있더라도 물자가 부족해서, 버터며 밀가루 설탕 같은 일용품들을 겨우 배급받던 시절의 조리법들 말이 예요. 버터나 설탕이 귀해서 평소에 비해 극소량 밖에는 구하지 못했다는 그 때에도, 주부들은 마법의 손으로 어떻게든 케이크까지 구워내곤 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시기에 그 조리법들이 사실은 돈으로도 살수 없는 최고의 건강식이었다는 군요. 경제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몸과 마음의 건강이 청빈 속에서 자란다는 것을, 이미 한번 몸소 겪은 제 입장에서는, 그 얘기가 쉽게 이해되더라고요. 저 이렇게 소박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답니다. 항상 따사롭게 지켜봐 주셔서 든든하고 고맙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9219일 방송> a.

 

2. “목자와 양(1-6)”착한 목자(7-18)”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 착한 목자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신 후(7-10), 이어서 자신을 양들의 착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착한 목자인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삯꾼 목자를 대비시키신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슬픈 추억이 소환되곤 합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지 몇 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제가 속한 교단은 교회 수가 10개도 되지 않던 때였기에 불과 5년짜리 목사가 중견급으로 교단 행정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당시는 개척교회가 생기면 목회자가 이동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지방의 한 교회도 그런 어려움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교회 목사가 다른 교회로 이동해야 했는데, 교회 제직들이 반대가 심했습니다. 개척 위원의 한 사람인 제가 그 교회를 방문해서 제직들을 설득시킬 임무를 띠고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 출신 장로 한 분이 화를 내시면서 삯군의 목자들이 아닙니까?”라고 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삯꾼의 목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좀 나은 교회로 옮겨가는 것을 그렇게 비유하신 것입니다. 삯꾼이라는 말은 결코 나쁜 용어는 아닙니다만, 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나쁜 말입니다.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저버리고 이득만을 찾아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철새 같은 지도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착한 목사란 어떤 인물인가를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존재라고 하십니다(11).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묵상해야 합니다. 직업이 아니라 사명이라는 신념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업으로써 목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목숨을 걸고 일하는 게 아닌 때문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철새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제 윗동서가 평생 교직에 계시다 은퇴를 하시면서 제게 물었습니다. 뭘 해볼까? 그래서 제가 조언을 드렸습니다. 책방을 여시든지, 아니면 마을 훈장이 되셔서 아이들을 가르치시든지 하시라고. 삶의 일관성을 생각했던 조언이었는데, 먹고 살기에 도움이 안 된다며 은퇴할 때 받은 큰돈을 굴려 그 이자로 편히 살겠다더니, 친구에게 빌려주고 알거지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 예는 부지기수입니다. 평생 교사로 살던 제 스승은 장사꾼이 되셨는데, 허풍이 늘고 거짓말이 자연스러웠습니다. 둘째는 양들을 이해하는 목자라고 하십니다(14). 이해한다는 말은 겉으로 드러난 형편과 처지를 안다는 것만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생각, ,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누군가를 이해한다 말할 수 없습니다. 겉은 그럴 듯 한데 뻔히 보이는 속셈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득을 위해서 이용해 먹는 그런 위인들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다는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